가경(嘉慶) 경진년(1820, 순조 20) 봄에 3월 24일 선백씨(先伯氏)가 학순(學淳)을 데리고 춘주(春州)에 가서 며느리를 맞아올 때에 작은 배를 꾸며 협중(峽中)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때 나도 따라가서 소양정(昭陽亭)에 올라 청평산(淸平山) 폭포를 보고 절구시(絶句詩) 25수, 화두시(和杜詩) 12수, 잡체시(雜體詩) 10수를 지었다. 그후 4년이 지나 계미년(1823, 순조 23) 여름에 4월 15일 학연(學淵)이 대림(大林)을 데리고 춘주에 가서 며느리를 맞아올 때에 역시 작은 배를 꾸며 협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때 내가 또 따라갔으니, 마음은 한계(漢溪)와 곡운(谷雲)에 있었다. 특별히 큼직한 고기잡이배를 구하여 마치 집처럼 꾸미고 그 문미(門楣)에다가 ‘산수록재(山水綠齋)’라는 편액을 걸었으니 이것은 내가 썼다. 그리고 좌우 기둥에는, 한쪽에는 ‘장지화가 초삽에 노닌 취미[張志和苕霅之趣]’라고 쓰고 한쪽에는 ‘예원진이 호묘에 노닌 정취[倪元鎭湖泖之情]’라고 썼으니 이는 승지(承旨) 신작(申綽)의 예서(隸書)이다. 또 학연의 배에 쓰기를 ‘유어황효녹효지간(游於黃驍綠驍之間 황효와 녹효 사이에서 노닌다는 뜻임)’ 이라 하고, 그 기둥에는 ‘부가범택(浮家汎宅 물에 뜬 집이라는 뜻임)ㆍ수숙풍찬(水宿風餐 물위에서 자고 바람을 먹는다는 뜻)’ 이라 썼는데, 천막과 침구, 그리고 필기구, 서적에서부터 약탕관과 다관(茶罐), 밥솥 국솥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속으로는 화공 한 사람을 대동, 단연(丹鉛)과 담채(澹采)를 들려 수행시키면서 물이 다하고 구름이 일어나는 곳이라든가, 버들 그늘이 깊고 꽃이 활짝 핀 마을에 이를 때마다 배를 멈추고 그 좋은 경치를 가려 제목을 붙이고 그리게 하고 싶었으니, 그것은 이를테면 ‘사라담에서 수종사를 바라보다.[沙羅潭望水鐘寺]’라든가 ‘고랑도에서 용문산을 관망하다. [皐狼渡望龍門山]’ 등으로서 모두 그려둘 만한 절경이었다. 선비 방 우도(方禹度)란 자가 산수화에 능하여 3ㆍ4중첩의 깊고 얕은 경지를 잘 그렸다. 학연이 몸소 찾아가 데려왔는데, 온 지 며칠 안 되어 한질(寒疾)이 생겨 대동할 수 없게 되어 유감천만이었다. 그 후 주위에 방 선비와 절친한 자가 있어 말하기를,
“그가 묵은 지 며칠이나 되며 그가 먹은 쌀은 몇 되나 되는가?"
고 묻기에 대답하기를,
“3일 동안 머물렀는데 끼니마다 반 되를 먹었다.”
고 하였더니, 그 사람은,
“어허! 그 사람 가게도 되었군. 그는 한 끼에 두 되씩 먹어 하루 세끼 여섯 되의 밥을 먹는데 날마다 6분의 1을 먹었으니 어찌 병이 나지 않겠는가. 그가 가게 된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하였다. ○ 약암(約菴) 이여홍(李汝弘)이 소식을 듣고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죽산(竹山)으로부터 1백 20리를 달려와 같이 가기로 약속하였고, 서울 사는 소년 한만식(韓晩植)ㆍ우정룡(禹正龍)ㆍ오상완(吳尙琬)이 듣고 역시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와서 배에 태워주기를 애원하였다. 내가 ‘배는 작고 짐이 무거워 탈 수 없다.’고 하자, 소년들이 모두 서운해하므로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4월 15일 갑인. 맑음. 일찍 일어나 발선(發船)하여 남자주(藍子洲)에 배를 대놓고 노와 닻줄을 손질한 다음, 공달담(孔達潭)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황공탄(惶恐灘)에 올라 호후판(虎吼阪)에서 잤다. 호후판은 단 세 집이 사는 마을인데, 두집은 서로 상투를 잡고 치고 받으며 싸워서 그 고함소리가 호랑이 우는 소리와 같았고, 한 집만이 문을 닫고 있어서 그 집을 빌어 유숙하는데, 마침 주인 노파가 산에 올라 화전에 불을 놓㋤가 나무 그루터기에 발꿈치를 찔려 밤새도록 그 고통을 부르짖으므로 창문을 사이에 두고 자는 자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세상이 대개 이처럼 고경(苦境)이다. ○ 우생(禹生)이 몇 리를 가다가 멀미를 하여 뭍에 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내려 놓고서 도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고 연안을 따라 좇아오니 이것 역시 고심(苦心)이었다. 경진년 봄에 황공탄에 올라 시를 지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생략함 [節]
이 물은 곧 폭포수의 유니 / 玆是瀑布類 여울이라곤 이를 수 없네 / 不可湍瀨論 고요한 하늘에 질풍이 일어나니 / 靜天生疾飇 서늘한 바람에 봄 더위를 잊네 / 瀟瀟忘春暄
또 다음과 같다.
간신히 험준한 곳을 지나니 / 艱崎度絶險 다시 정연한 천지가 나오네 / 復得整乾坤 누른 꾀꼬리 녹음으로 날아드니 / 黃黧赴綠陰 아름다운 경치가 성황을 이루네 / 蔥然時景繁
지금 보는 경치도 이와 같으므로 다시 시를 짓지 않았다.
○ 절구시(絶句詩)는 다음과 같다.
청평의 마을 경치 강을 향해 열렸으니 / 淸平村色對江開 나직한 버들 흰모래 언덕 안고 돌았네 / 短柳晴沙抱岸廻 물이 다하여 근원 끊긴 곳에 이르니 / 直到水窮源斷處 푸른 산이 문득 한 척의 배 토했네 / 靑山忽吐一船來
○ 경진년에는 시(詩)로 행로(行路)를 기록하여 갈 때의 길은 상세히 기록하고 회로(回路)의 기록은 소략히 하였는데, 금년에는 특별히 물길을 기록하는 터이라, 갈 때의 길은 대략 기록하고 회로의 기록은 상세히 하였다. 이것은 피차를 서로 구비하려는 것이요, 또 수원을 따라 탐구하여 수경가(水經家)의 보주(補註)를 돕고자 하는 목적에서였다. 이 약암(李約菴)의 시는 다음과 같다.
작은 배 가벼이 흔들려 베 포장이 열리니 / 舴艋輕搖布幔開 뱃머리에 걸린 편액 또한 기이하네 / 船楣揭額亦奇哉 녹효의 물이 우수산으로 통하였기에 / 綠驍之水通牛首 그 수원을 탐구하기 위해 여기에 왔네 / 秪爲窮源有此來
16일. 늦게 개었다. 학연(學淵)이 병이 났기 때문에 늦게 출발하여 자잠포(紫岑浦)에서 조반을 먹고 복정포(福亭浦)에서 점심을 먹었다. 밤에는 안반촌(安盤村)에서 잤는데, 자던 집이 몹시 정결하였고 주인 노파도 괴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 자잠(紫岑) 위에 송의항(松漪港)이 있는데 암석이 몹시 기괴하였다. 경진년 봄에 배턱에 배를 대놓고 그 암석 사이에 끼어 앉아 형제가 함께 밥을 먹었는데, 그 생각이 역력히 떠올라 마치 어제 있었던 일 같았다. 이로 인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떠나지 못하고 한참동안 있었다.
○ 경진년 봄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동쪽으로 열린 협구 재갈풀린 입 같은데 / 峽口東呀似解箝 자잠의 모난 석각 구름 위에 솟았네 / 紫岑芒角入雲尖 신비한 십리 물길 꽃 띄워 흘러가니 / 靈源十里流花水 그 물결 한 자나 높아졌음을 알겠네 / 解使烟波一尺添
○ 또 다음과 같다.
송의마을 북쪽 석벽 높기도 높아 / 松漪村北石崔崔 하늘이 만든 금성 물을 등졌네 / 天作金城背水隈 저 마늘봉은 보루 쌓기에 좋다지만 / 可但蒜峯宜築堡 넓은 호수 동쪽 뫼 참으로 기묘하네 / 太湖艮嶽儘詼瓌
오장곡(鄔莊谷)서부터 산세가 수려한데, 녹효(綠驍)의 물이 이곳으로 들어온다. 입천(笠川) 또한 아름답다.
○ 경진년 봄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오른쪽으로 홍천을 지나 입천에 와 닿아 / 右過洪川次笠川 유가만 아래 잠시 배를 멈추었네 / 柳家灣下乍停船 석양의 한 조각 외로운 노을은 / 夕陽一片孤霞影 먼 산봉우리에 걸쳐 타는 듯하네 / 斜曳遙峯熂爐煙
○ 또 입천도시(笠川渡詩)는 다음과 같다.
녹효수는 산수로 달리는데 / 綠驍赴汕水 두 언덕이 우뚝 마주섰네 / 對立雙斷岸 가느다란 물줄기 조용히 흘러 지나니 / 細流靜相過 강한에 비교하기엔 너무도 부족하네 / 未足方江漢 우리집 문앞의 물과 비교해 보아도 / 眂我門前水 반의 반밖에 되지 않네 / 且爲半之半
생락함[節]
푸른 봉우리 저녁 아지랑이 걷히니 / 夕靄澹靑㟽 남은 노을 다시 엉겨 찬란하누나 / 餘霞復靡漫 배 멈추고 고기떼 굽어보니 / 亭舟頫魚隊 온갖 잠념 씻은 듯 없어지네 / 百慮淨蕭散
이 약암(李約菴)이 자잠(紫岑)을 지나면서 지은 시(詩)는 다음과 같다.
자잠 남쪽 기슭 오솔길 비꼈는데 / 紫崿南頭細徑斜 설암 옛터에 연하가 잠겨 있네 / 雪菴遺址鎖煙霞 복소궁 무너지고 여강은 차가운데 / 北蘇宮廢驪江冷 도원의 흐르는 물 꽃은 이미 져버렸네 / 流水挑源已落花
17일. 짙은 안개가 끼었다. 일찍 출발하여 안개를 뚫고 석지산(石芝山)을 지나 곡갈탄(曲葛灘)에 올랐다. 언덕 위에서 말 모는 소리가 나기에 사실을 물어본 결과 윤종대(尹鍾岱)의 마부였다. 윤 종대가 앞서 약속하고도 떠날때 미처 당도하지 못하였는데, 배를 좇아 앞질러서 마당촌(麻當村)에 이르러 쉬며 기다리고 있으니 기쁜 일이었다. 작탄(鵲灘)에서 조반을 먹고 마당촌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윤질(尹姪)을 싣고 현등협(懸燈峽)을 거쳐 신연(新淵)에 이르니 해가 벌써 너웃너웃 넘어가고 있었다. 사공이 죽전촌(竹田村)에서 자자고 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배를 재촉하여 황혼(黃昏)에 소양정(昭陽亭) 밑에 정박하였다.
○ 경진년 봄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일산만한 하늘 협구 따라 열렸는데 / 一蓋天從峽口開 가릉의 풍물 또한 아름다워라 / 嘉陵風氣赤佳哉 둘러선 석지산 푸르기도 한데 / 石芝山色逶迤綠 풍악소리 때때로 군수 찾아오네 / 絲竹時時郡守來
○ 또 다음과 같다.
남이점 밑 방아올은 방언에 도서(島嶼)를 점(苫)이라 한다.《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보인다. / 南怡苫下方阿兀 한자로 쓰자면 구곡이라 하네 / 譯以文之臼谷云 온조왕 회군한 곳 아! 바로 이 땅이다 / 溫祚回軍噫此地 함박눈 날리던 그 정경 머리에 떠오르네 / 一天大雪想紛紛
○ 또 다음과 같다.
검정 돌 바둑처럼 널린 정족탄에 / 䃜石棊鋪鼎足灘 한 척의 작은 배로 푸른 물결 뚫고 나왔네 / 一梭穿出綠漪瀾 황효 어부 길에서 만나 / 黃驍漁子行相遇 또 다시 고기를 사 저녁 반찬 부탁하네 / 又買銀鱗付夕餐
○ 또 다음과 같다.
난산 한 지역 상기도 천황인데 / 蘭山一面尙天荒 공중에 달린 각도 십리나 기네 / 閣道飛空十里長 작뢰 동쪽에서 고개 돌려보니 / 鵲瀨東頭重回首 경기의 산빛 아득하누나 / 京畿山色已迷茫
○ 삼악시(三嶽詩)는 다음과 같다
높기도 할사 석파령은 / 崔崔席破嶺 삼악산의 지맥일세 / 是蓋三嶽餘 곱고 묘한 봉우리 없기는 하나 / 雖無娟妙峯 방어엔 자못 허술하지 않네 / 捍禦頗不踈 어이하여 왕조와 최리는 / 王調與崔理 부질없는 죽음당하였나 / 浪作釜中魚 한 나라 태수 공연히 바다를 건넜지 / 漢吏空越海 답답한 이 땅 어디에 살건가 / 鬱鬱安能居 막막한 저 청류관에 / 漠漠淸流關 초목이 비로소 눈이 트네 / 草木嫩初舒
생략함[節]
○ 그 현등협시(懸燈峽詩) 주(注)에 ‘현등(懸燈)은 등달(燈達)이니 방언에 현(懸 달현)을 달(達)이라 하고, 등달(燈達)은 배달(背達)이니 방언에 배(背 등배)를 등(燈)이라 한다.’ 하였다. 또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난산(蘭山)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배달현(背達縣)이다.’ 하였고, 현등협(懸燈峽)이 곧 삼악(三嶽)의 동쪽에 위치하였으니, 난산(蘭山)의 옛 고을은 삼악 남쪽에 있어야 한다. 시는 다음과 같다.
현등은 옛날의 난산이라 / 懸燈古蘭山 그 절벽 초토를 이고 있네 / 絶壁戴焦土 두 언덕 서로 마주치려 하니 / 兩厓欲相撞 묶인 듯 좁은 골짜기 언제나 어둡네 / 束峽昏萬古 사람의 어깨도 걸릴까 걱정하여 / 直愁礙人肩 실오리 강물이 길을 통했네 / 江流通一縷 높이 달린 잎새는 하늘 바람을 흔들고 / 高葉搖天風 달리는 여울물은 지주를 흔드네 / 崩湍掀地柱 옹기종기 산봉우리 해를 가리우니 / 攢峯蝕太陽 맑은 낮에도 흙비가 날리네 / 淸晝騰霾雨
○ 석문시(石門詩)는 다음과 같다.
천지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니 / 二儀忽昭廓 들빛은 어찌 그리도 장한가 / 野色噫何壯 숨쉬기도 두렵던 긴장 이윽고 풀리나 / 悚息俄縱弛 산란하여 다시 향할 곳을 모르겠네 / 散朗疑所向 좁기는 하지만 옛날에는 나라이니 / 蕞爾曾亦國 하늘이 만든 별다른 지세일세 / 天作有殊狀
생략함[節]
삼한과 한 나라 바둑을 다투어 / 韓漢競弈棋 아침저녁 분분히 득실을 자주했네 / 蚤莫紛得喪 간교한 지모 염착도 / 廉鑡逞智詐 끝내 낙랑의 임금 되지 못했네 / 樂浪竟不王
○ 신연도시(新淵渡詩)는 다음과 같다.
사랑스런 이 선원수 / 愛此仙源水 그 근원 장안교에서 나오네 / 本出長安橋 일찍부터 명산 보기를 원했건만 / 夙昔名山願 늙도록 뜻을 이루지 못했네 / 到老意蕭蕭
생략함[節]
○ 소양도시(昭陽渡詩)는 다음과 같다
우마 도두에 서 있는데 / 牛馬立渡頭 사수 또한 무량히 흐르네 / 沙水復平安 그 경치 도읍에 가까와 / 氣色近都邑 넓은 들 거침이 없네 / 曠莽無險難 강물이 둘러 누대가 통창하고 / 江繞朱樓鬯 산이 멀어 들이 넓네 / 山遠平蕪寬 넘실거리는 배 춤추듯 유연컨만 / 便娟有柔態 추악한 그 모습 광란에 부끄럽네 / 麤惡羞狂瀾
생략함[節]
18일. 소양정(昭陽亭) 밑에 머물렀는데, 날이 새기 전에 조금씩 비가 내리더니 아침나절에도 계속 흐려 음산하다가 저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개었다. 약암(約菴)과 연(淵), 그리고 운질(尹姪)ㆍ한(韓)ㆍ우(禹)ㆍ오(吳) 제생이 모두 소양정에 올랐는데, 이 경지(李景祉) 광수(光壽)의 자이다. 가 정 중군(鄭中軍)과 현 파총(玄把摠)을 이끌고 주연을 열어 그 음악소리가 요란하였다. 나는 꼼짝않고 누워 참석하지 않고 이르기를,
“소양정이 이제 예음정(曀陰亭)이 되었으니 오를 수 없다.”
고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호민(李好敏) 또한 함흥(咸興)ㆍ영흥(永興)의 제릉(諸陵)를 봉심(奉審)하고 돌아오다가 춘천을 거쳐 홍천으로 가면서 저녁에 소양정에서 쉬게 되었는데, 그 나팔소리와 기치의 위의가 자못 성대하였다. 나 혼자 술집에 앉아 있는데 늙은 향갑(鄕甲 풍헌(風憲))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에게 전 도호(都護) 승지(承旨) 이인보(李寅溥)이다. 가 왜 그리 빨리 돌아갔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말이,
“이제 춘주(春州)는 망했습니다. 비록 선정을 베푸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터이라 결국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창고가 다 비었기 때문에 갇히는 아전이 10여 명씩이나 되는데, 그 집을 적몰하려 해도 물건이 없고 그 일가를 찾아 물리려 해도 사람이 없습니다. 관장이 이를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또 군액(軍額)이 모두 빔으로써 향갑(鄕甲) 곧 풍헌(風憲)이다. 에게 독촉하여 전포(錢布)를 바치게 하는데, 한번 향갑을 지내면 패가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요한 백성으로서 향갑의 인망이 있는 자는 모두 도망쳐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패랭이에 빗을 꽂은 미천한 사람뿐이니 관장이 이를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또 화전세(火田稅)를 전에는 부(府)에서 받아들였는데 지금은 훈국(訓局)의 관리가 나와 거둬들여 그 횡렴(橫斂)이 한정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산판이 드디어 묵게 되니 관장이 이를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또 분원(分院)에 백토(白土)를 실어가는 그 배의 선가가 6백 냥인데 모두 이포(吏逋 아전들이 사사로이 이용하여 축냄)를 이루어 해마다 부과를 궐함으로써 사옹원(司饔院)의 책망을 받게 됩니다. 관장이 이를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또 본 부(府)에는 아전이 본래 80여 명이나 되는데 근실한 자는 다 도망치고, 지금 30여 명이 부에 있을 뿐인데 모두 기아의 마귀가 되어 돈을 보나 곡식을 보나 모조리 삼켜 버립니다. 관장이 이를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지름 비록 공(龔)ㆍ황(黃)이 부임한다 하더라도 역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갈 것입니다.”
라고 한다. 내가 생각건대, 춘천은 우리나라의 성도(成都)이다. 공명(孔明)은 촉(蜀) 땅을 점거하고 회복을 도모하였으며, 명황(明皇)은 촉땅으로 파천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춘천 역시 국가에서 필히 보호해야 할 땅인데 지금 이와 같이 패망하였으니 아!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다시 불러들여 안정시키자면 6~7년 동안이 아니고는 안 될 것인데, 지금 또한 아침에 제수하면 저녁에 옮기게 되었으니, 아! 이를 장차 어찌할 것인가.
19일. 정자 아래에 머물렀는데 일기가 쾌청하였다. 약암(約菴)과 한(韓)ㆍ우(禹)ㆍ오(吳) 세 사람은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폭포를 보고 저녁때 돌아왔으며, 연아(淵兒)는 샘밭[泉田]에 가서 참봉(參奉) 이목(李楘)과 여러 이씨(李氏)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윤 유청(尹唯靑)에게 대림(大林)을 데리고 도정촌(陶井村) 최씨(崔氏) 집으로 가게 하여 저녁때 연아(淵兒)와 그곳에서 희합하여 납징례(納徵禮)를 행하게 하였다. 나만이 홀로 머물러 있었는데 이 경지(李景祉)가 같이 있어 주었다. 내가 약암(約菴)에게,
“기락각(幾落閣)은 포복천(匍匐遷)인데 농암(農巖)은 이를 부복천(扶服遷)이라 하였다. 부복(扶服)은 곧 포복(匍匐)이다. 잔도(棧道)가 매우 위태하여 사람들이 모두 기어서 지나가는데, 그것을 방언으로 바꾸어 해석하면 기(幾)는 포복(匍匐)이요, 낙이(落伊)는 출(出)이니 기어서 나가는 것[匍匐而出]을 이름이다. 중간에 석굴이 있는데 옛날에는 길이 이 석굴을 통하였기 때문에 기어서 나갔던 것이다. 나는 ‘곧 추락할 것 같다.[幾乎墮落]’고 해서 기락각(幾落閣)이라고 썼다. 옛날에 절도사(節度使) 이격(李格)은 소를 타고 이곳을 지나갔는데 그대도 소를 타고 지나갈 수 있겠는가?"
하니, 약암의 대답이,
“아니다. 나는 감히 그리할 수 없다.”
고 하였다.
○ 경진년 봄에 지은 기락각시(幾落閣詩)는 다음과 같다.
깊은 협중에 해가 뜨니 / 絶峽破積陰 새벽 노을 강에 비쳐 붉네 / 晨霞照江赤 내려다보니 깊은 못이요 / 高臨不測淵 올려다보니 구를 듯한 바위일세 / 仰蒙將落石 서울에서 보면 이것이 북문이라 / 名都此北門 엄히 잠긴 빗장 철벽과 같네 / 嚴扃鎖鐵壁 가벼운 배 공연히 버려두고 / 輕舟漫自棄 짚신을 신고 산객을 따라가네 / 躡屩隨山客 넋이 떨려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데 / 魄慄不敢前 새로운 진흙에 호랑이 자국이 있네 / 新泥印虎跡 수석은 본래 청한한 것이건만 / 水石本閒事 그 누구의 핍박한 바 되었던고 / 顧爲誰所迫 본성이 좋은 것을 어떻게 억제하랴 / 性好那可節 고라니 떼 저 늪속을 즐기네 / 麋麈悅林澤 훌륭하다 이자현이여 / 賢哉李資玄 깊은 산 이곳에 자적했네 / 深山自此適
○ 청평사(淸平寺)에서 자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생략함[節]
청평거사 진락공은 / 淸平居士眞樂公 꽃다운 이름 사책에 빛나네 / 史冊流徽光煜煜
생략함[節]
초도가 얼음산임을 이에 알았고 / 懸知椒塗氷作山 소장 안 바람이 촛불 끌 것을 미리 보았네 / 逆覩蕭牆風滅燭 칠귀수 풀어 던지고 삼베옷 걸쳤으며 / 解七貴綬穿麻衣 오후청을 싫다 하고 나물국을 먹었네 / 吐五侯鯖茹香蓛 궁중에선 까마귀가 떡을 쫀다 들었건만 / 已聞宮裏烏啄餠 어찌하여 산중에서 죽만 끊이고 있단 말가 / 何如山中缹作粥
생략함[節] 조그만 티는 백옥을 가리우지 못하고 / 微瑕未足掩白珩
흙 속의 벌레는 황곡에 비교하기 어렵네 / 壤蟲要難比黃鵠 이자현(李資玄)이 탐하고 인색한 흠이 있었기 때문에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의 시에 이르기를 "조그마한 흠을 가지고 백옥을 가리우지 말라,[莫把微疵掩白珩]"고 하였다.
○ 관폭시(觀瀑詩)는 다음과 같다.
일백 번 변하여 고이고 흐르는 형세 / 百變渟流勢 그 근원은 한 줄기 샘이었네 / 由來一道泉 달릴 때야 누가 그를 잡으랴 / 走時誰迫汝 머무를 때엔 문득 소연해지네 / 留處忽蕭然 서글픈 낙화는 함께 가지만 / 怊悵花俱往 웅장한 돌은 옮기지 못하네 / 雄豪石不遷 알랴 이 산을 벗어나는 그날 / 須知出山日 넓게 퍼져 평천을 이루리 / 浩淼作平川
또 다음과 같다.
날카로움은 산을 뚫고 들어가려 하고 / 銳欲穿山入 요란함은 나무 흔들어 시원하네 / 喧能撼樹涼
○ 청평동구(淸平洞口)를 나오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소 타고 돌길 십리를 돌아 / 石逕騎牛十里廻 묵은 등나무 헤치자 동천이 열리네 / 壽藤披豁洞天開 맑은 강 저 일렁이는 물은 / 澄江一面漣漪水 청평산 폭포를 이루어 왔네 / 曾作淸平瀑布來
약암(約菴)의 관폭시(觀瀑詩)는 다음과 같다.
한 가닥 폭포수 몇 봉우리나 압도했나 / 一道飛泉倒幾峯 긴 바람 소리 성긴 송림 울리네 / 長風送韻入踈松 싸늘해진 의복 산비인가 놀라고 / 衣巾颯爽驚山雨 온갖 소리 울려나 청평사 종 화답한다. / 律呂琮錚和寺鍾 허리엔 흐르는 비단 묶은 듯 비껴 흩어지고 / 腰束流紈斜欲迸 입술엔 옥액을 머금은 듯 내려 찧네 / 脣含玉液下仍舂 당시의 진락공이 응당 이것 인연하였으리 / 當時眞樂應緣此 한 굽이 맑은 물에 만첩청산일세 / 一曲澄泓翠萬重
20일. 맑음. 약암(約菴) 등과 함께 소양정(昭陽亭)에 올라 여러 사람들의 시를 써서 건 다음, 정자 아래에 배를 띄우고 맑은 물 위를 소요하였는데, 현생(玄生)이 좋은 술 한 병을 보내왔다. ○ 해가 질 무렵에 복마(僕馬)가 비로소 도정(陶井)으로부터 돌아왔다. 드디어 약암 등 여러 사람과 함께 곡운(谷雲)으로 떠나는데, 한(韓)ㆍ우(禹)ㆍ오(吳) 제생은 피곤하여 따를 수 없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매월당(梅月堂) 김 시습(金時習)의 시는 다음과 같다.
새가 나는 밖에는 하늘이 다하고 / 鳥外天將盡 읊조리는 자리엔 감탄이 그치지 않네 / 吟邊恨不休 산은 대개 북쪽을 좇아 돌고 / 山多從北轉 강물은 스스로 서쪽을 향해 흐르네 / 江自向西流 기러기는 평원한 모래톱에 내리고 / 鴈下沙汀遠 배는 그윽한 옛 언덕으로 돌아오네 / 舟回古岸幽 어느 때 세상만사 모두 잊어버리고 / 何時抛世網 흥겨운 마음으로 이곳에 다시 노닐꼬 / 乘興此重遊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시는 다음과 같다
삼월 소양강 강 위에 선 누각 / 三月昭陽江上樓 누각 앞 풍경 노닐기에 좋아 / 樓前形勝最堪游 땅 트이고 하늘 높으니 등각에 비길 만하고 / 地逈天高擬滕閣 물 맑고 모래 희니 기주와도 같네 / 渚淸沙百似夔州 살구꽃 지고 복사꽃 시들어 / 杏花已落桃花老 왕손 돌아오지 않아라 방초의 시름일레 / 王孫未歸芳草愁 술 깨어 기대어서 휘파람 길게 불제 / 酒醒倚柱發長嘯 서산에 지는 해가 우두에 비치네 / 西山落日射牛頭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호)의 시는 다음과 같다.
산사에서 돌아올 땐 마음이 섭섭터니 / 山寺歸來意悵然 누각 앞에 이르자 눈이 환히 열리네 / 眼明還是此樓前 난간엔 언제나 햇살이 비껴 들고 / 闌干今古橫斜日 돛대는 이리저리 강물을 따라가네 / 舟楫東西閱逝川 맥국의 가을빛 벼가 들에 가득하고 / 貊國秋容禾滿野 우촌의 저녁 나무에 연기 나네 / 牛村晩景樹生煙 맑은 강에 명작의 마땅함을 알았으나 / 澄江最覺宜佳句 어찌하면 소사처럼 고운 시구 읊을꼬 / 安得詩如小謝姸
○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호)의 시는 다음과 같다.
소양강 위에 높다란 누각 하나 / 昭陽江上有高樓 우리 조부 오셔서 노닐 만하다 하셨네 / 吾祖來臨曰可游 금대의 요지라 한남 땅에는 없고 / 襟帶將無漢南地 아름다운 풍경 패서를 압도하네 / 風流欲倒浿西州 노는 고기 즐거우니 발과 기둥 흔들리고 / 簾楹搖蕩游魚樂 지나는 기러기 수심은 아득한 모래톱일세 / 沙渚微茫過鴈愁 북쪽 바라보니 아득히 여운 이는데 / 北望迢迢生遠韻 푸른 아지랑이 경운(궁성) 머리에 떴네 / 靑嵐浮出慶雲頭
○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의 시는 다음과 같다.
강 서리고 산 열려 정주가 나타나니 / 江盤峽坼見汀洲 평야는 아득한데 천지는 가을일세 / 平埜茫茫天地秋 높은 누각 낮은 산록에 걸터앉고 / 忽得危樓跨短麓 우뚝한 언덕 긴 강물을 굽어보네 / 高臨絶岸俯長流 뜰앞 가는 물 언제 멈춘 적 있던가 / 堦前浙水何曾住 난간 밖의 뭇산들 뜨고자 하네 / 檻外群山盡欲浮 날 저문 타향이라 올라 관망하며 한하건만 / 落日殊方登眺恨 갈대 물가 목욕하는 해오라긴 수심을 모르네 / 蒹葭浴鷺不知愁
○ 유재(游齋) 이현석(李玄錫)의 시는 다음과 같다.
별계의 풍경이 십주와 같은데 / 別界風煙近十洲 뱃길과 들빛 모두 가을철에 마땅하네 / 船洄野望摠宜秋 산은 맥국을 둘러 하늘을 찌를 듯 솟고 / 山圍貊國攙天聳 물은 금강에서 발원하여 바다를 향해 흐르네 / 水自金剛學海流 햇빛 띤 찬 까마귀 아스라이 애처롭고 / 帶日寒鴉憐影遠 난간 앞 지나는 가벼운 익주(鷁舟) 마름과 함께 떠 있네 / 過欄輕鷁等萍浮 거문고와 술 겨를 많아 강만이 고요하니 / 琴尊多暇江蠻靜 읊조리는 흥취 유연하여 수심 따위 관계없네 / 吟興悠然不管愁
○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시는 다음과 같다.
정월에 소양정 위를 지나게 되었나니 / 正月昭陽亭上行 석옹이 떠난 후 감히 함부로 논평하네 / 石翁之後敢容評 멀리 연기 성긴 마을 사람 하나 가는데 / 遙村煙闊一人去 지는 해 찬 모래에 쌍학이 우네 / 落日沙寒雙鶴鳴 산의 눈 강의 얼음 한층 더 청절하고 / 山雪江氷更淸絶 하늘 높고 땅 멀어 분명함을 알겠네 / 天高地逈覺分明 말하지 말게나 이른봄보다야 늦은 봄이 좋다고 / 休言春晩勝春早 담담한 곳에서 진미가 나는 법이라네 / 眞味方從淡處生
○ 상국(相國) 조재호(趙載浩)의 시는 다음과 같다.
모래빛 솔안개 둘이 서로 배회하는 데 / 沙光松翠兩徘徊 원세 열린 곳 정자 하나 우뚝하네 / 亭在其間遠勢開 들은 맥국의 옛터 둘러 손바닥처럼 드러나고 / 野繞貊墟如掌出 강물은 인협을 따라 옷깃처럼 돌아드네 / 江從麟峽似襟回 가을들엔 마을 소 외로이 점쳐 있고 / 秋蕪孤點村牛細 해 저문 물가엔 기러기떼 울음소리 슬프네 / 晩渚群號客鴈哀 가무의 즐거운 연회 머무를 수 없으니 / 歌管初筵淹不得 그림 난간 비낀 해가 돌아가길 재촉하네 / 畵欄斜日故相催
○ 경진년 봄에 내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어부가 수원을 찾아 동천으로 들어가니 / 漁子尋源入洞天 붉은 누각이 만정봉 앞에 날아드네 / 朱樓飛出幔亭前 궁ㆍ유의 할거는 혼연히 흔적이 없어졌고 / 弓劉割據渾無跡 한ㆍ맥의 싸움은 끝내 가련하게 되었네 / 韓貊交爭竟可憐 우수산 옛밭엔 봄풀이 아스라하고 / 牛首古田春草遠 인제 흐르는 물엔 낙화가 어여쁘네 / 麟蹄流水落花姸 사롱과 수불 어떻게 이어갈꼬 / 紗籠袖拂嗟何補 물가 버드나무 석양에 홀로 배를 푸네 / 汀柳斜陽獨解船
조위(曹魏) 정시(正始) 연간에 낙랑 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대방 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이 바다를 건너와 점령, 북쪽으로 고구려에 대항하고 남쪽으로 진한(辰韓)을 공격하여 진한을 빼앗아 입국하였는데, 이때 낙랑의 근거지가 실제 춘천에 있었다.
○ 약암(約菴)의 시는 다음과 같다.
그림 같은 강산에 높은 누각이 있어 / 江山如畵有高樓 맥국 옛터에 먼곳 손이 노니네 / 貊國遺墟客遠游 옛날 온조가 회군하던 곳 그 어디든고 / 溫祚回軍昔何地 팽오가 공격해 온 곳이 바로 이 고을일세 / 彭吳穿峽卽斯州 겹관문 싸안으니 험난함을 알겠고 / 重關拱抱方知險 비옥한 들 넓으니 걱정 잊을 수 있네 / 沃野平寬可滌愁 이 절승한 곳에 올라 굽어보니 / 最是登臨奇絶處 석양의 마을 연기 우두에 일어나네 / 村煙落日起牛頭
맥국에 대한 변증[貊辨]은 다음과 같다.
춘천(春川)은 맥국(貊國)이 아니다. 맥(貊)이라는 글자가 이(夷)ㆍ적(狄)ㆍ융(戎)ㆍ만(蠻)과 같이 정동(正東)을 이(夷), 정북을 적(狄), 동북을 맥(貊), 동남을 민(閩)이라 한다. 《주례(周禮)》에 보인다. 세상에 이국(夷國)도 없고 적국(狄國)도 없는데 어찌 유독 맥국(貊國)이 있겠는가. 맥에는 많은 종류가 있어 예맥(濊貊)ㆍ양맥(兩貊)ㆍ소수맥(小水貊)ㆍ구려맥(句麗貊)의 각각 같지 않은 것이, 마치 조이(鳥夷)ㆍ내이(萊夷), 적적(赤狄)ㆍ백적(白狄)과 같은 것이라 맥은 나라로 이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중국의 동북쪽에 있는데, 춘천은 중국의 정동에 있으니 더욱 맥이라 이름하기에 불가한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맥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한(漢)ㆍ위(魏)의 즈음에 낙랑(樂浪)이 남하(南下)하여 춘천으로 옮긴 후, 혹은 한(漢)의 관리가 파견되어 지키기도 하고 혹은 토추(土酋)가 빼앗아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낙랑의 근본은 평양(平壤)에 있었고 평양은 끝내 구려(句麗)에게 패망하였는데, 그 구려의 종족이 본래 맥과 더불어 혼합되었기 때문에 백제(百濟)ㆍ남한(南韓) 사람들이 다같이 낙랑을 가리켜 맥인이라 불렀으니, 그 근본은 평양으로부터 왔고 평양이 당시 구려맥(句麗貊)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탐(賈耽)의 《군국지(郡國志)》와 김부식(金富軾)의 백제사(百濟史)에서 그 그릇된 점을 분별해 밝히지 않고 낙랑으로 맥인을 만들어 놓았는데, 지금까지 그 그릇된 점을 그대로 답습하여 벗어날 줄 모른다. 맹자(孟子)의 말에 ‘맥에는 오곡(五穀)이 나지 못하고 오직 기장만이 난다.’고 하였는데 춘천이 그러한가? 《한서(漢書)》 조조전(鼂錯傳)에는 이르기를 ‘호맥(胡貊)의 땅에는 나무껍질이 세 치나 되고 얼음 두께가 6척이나 된다.’고 하였는데 춘천이 그런한가? 강릉(江陵)이 예(濊)가 아닌 이유가 또한 이와 같다. 예인(濊人)은 남하하여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겼는데, 가섭원은 하서량(河西良)이다. 그러므로 강릉은 예가 아니다.
○ 경진년 봄에 지은 우수주시(牛首州詩)는 다음과 같다.
생략함[절(節)]
아아, 이 낙랑성을 / 嗟玆樂浪城 그릇 전하여 맥향이라 부르네 / 冒名云貊鄕 나무 껍질은 한 치도 되지 않고 / 木皮不能寸 밭마다엔 오곡이 무성하네 / 五穀連阡長 따뜻한 지기(地氣)에 발육이 빨라서 / 地暄發生早 초여름에 벌써 나뭇잎 짙푸르네 / 首夏葉已蒼 뻐꾹새 소리 나무마다 요란하고 / 鳴鳩樹樹喧 꾀꼬리는 아름답게 노래를 부르네 / 黃鳥弄柔簧 남한이 옛날에 순무한 적이 있고 / 南韓昔巡撫 한사가 건너던 내 지금은 흔적 없네 / 漢使川無梁 돌에 새긴 것이 오랫동안 매몰되어 / 勒石久埋沒 여운 끝내 없어지고 말았네 우두산(牛頭山)에 팽(彭)ㆍ오(吳)와 통래한 비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薰聲竟微茫
이는 대개 춘천이 맥국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나는 양이(兩李)와 함께 10리 거리에 있는 수운담(水雲潭)을 지난 다음 5리를 더 가서 보통점(普通店)에 이르렀는데, 학연(學淵)과 윤유청(尹唯靑)이 도정(陶井)으로부터 와서 만났다. 서북쪽의 여러 산세를 바라보니 울창하게 두루 얽혀 있고, 그 푸른 아지랑이 산 그림자에다가 향풍을 일으키는 옷자락은 표표히 진세(塵世)를 벗어난 기분이었다. 강을 낀 등로(磴路)를 보통천(普通遷)이라 부르는데 그리 험하지는 않았다. 10리를 가서 문암서원(文巖書院)에 이르러 유숙하였는데, 서원은 깊은 산중에 있어 평생에 서울 양반을 보지 못하는 터라 자못 분주히 접대하며 존경하는 기색이 있었다. 두 재실에 불을 넣어 온돌이 몹시 따스하였다. ○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을 주벽으로 모셨는데, 선생의 외가가 춘천에 있어 어렸을 때 노닐던 유적이 있어서다. 좌측에는 지퇴당(知退堂) 이공(李公) 휘는 정형(廷馨)이다. 을 배향하였으니 만년에 춘천에 퇴거(退居)하였기 때문이요, 우측에는 용주(龍洲) 조공(趙公) 경(絅) 을 배향하였으니 명환(名宦)으로 문화의 유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튿날 아침에 연(淵)이 경지(景祉)ㆍ유청(唯靑)과 함께 예알(禮謁)하였다.
21일. 일찍 출발하였는데, 날씨가 흐려 비가 오려 하다가 늦게야 개었다. 서원에서 한 굽이를 돌아 침목령(梣木嶺) 무파래고개(巫巴來古介) 을 넘자 바로 침목천(梣木遷)을 만났는데, 까마득하게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것이 마치 기락각(幾落閣)과 같이 위태로웠다. 특별히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새로 지나감으로써 편편하게 길을 잘 닦아 발을 붙일 수 있었다. 10리를 행하여 인람역(仁嵐驛)을 지난 다음 한 굽이를 돌아 강물 서쪽 산너머를 보니 황량한 정자가 하나 있었다. 이는 곧 절도사(節度使) 이천로(李天老)의 별장(別莊)으로서 지암정자(芝巖亭子)라고 하는 것이다. 5리를 더 가서 모진도(牟津渡)에 도착, 나루를 건너니 이곳이 원당점(員塘店)이다. 북쪽으로 산마루를 바라보니 그 위에 조그마한 촌락이 잇는데, 이는 곧 이경중(李敬仲) 익(益) 의 묘촌(墓村)이다. 3리를 걸어 마령(馬嶺)을 넘었는데, 몹시 험준하였다. 역시 예조 판서의 덕택으로 다행스럽게도 말이 지치지 않았다. 5리를 걸어 서오촌(鉏鋙村)에 이르렀는데, 그 동쪽은 곧 이 병사(李兵使) 형제의 전장(田莊)이다. 서북쪽으로부터 산을 돌아나오는 물이 있는데, 바로 곡운(谷雲)의 하류이다. 여기서 낭천(狼川)의 큰길을 버리고 소로로 들었는데, 몇 리 사이가 험난하더니 한 모퉁이의 산을 돌아나오자 다시 평탄해졌다. 7리를 걸어 이곡촌(梨谷村)을 지났는데 마을 형태가 몹시 밝아 보이고 유명한 배나무 1백여 주가 있었다. 5리를 더 걸어 사외창(史外倉)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 이날 관에서 양식을 방출하였는데 수십여 명의 산중 백성들이 모였다. 창고의 곡식이 많이 축나 허위로 양식을 방출하고 그 결점을 미봉하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여기서부터는 모두가 처음 보는 지역이다. 비로소 새로 시(詩)를 지었다.
문암서원(文巖書院)에서 자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깊은 산 장수하는 곳 / 嶽麓藏修地 맑은 강물이 앞을 감돈다 / 滄江繞案回 재실은 함께 공부할 만한데 / 齋堪書共讀 선비들은 술 때문에 자주 찾아오네 / 儒以注頻來 풀은 우거져 돌층계를 덮었고 / 碧草深堦石 붉은 격자창은 재 속에 숨었네 / 紅欞隱竈灰 무슨 연유로 산중 스승이 되었는고 / 何由作山長 은둔하여 영재를 기르기 위해서네 / 遯跡育英才
○ 침목령(梣木嶺)을 넘으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고갯길 빙빙 돌아가도 되돌아오는 듯 / 嶺路盤紆往似廻 산머리 벌린 암혈 부는 바람 맞이하네 / 上頭呀穴受風來 대마디 같은 층층 여울 만날 때마다 걱정인데 / 愁臨竹節層層瀨 요란한 물소리 금강산 만폭일레 / 猶作金山萬瀑豗
○ 지암정(芝巖亭)을 지나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푸른 시냇가에 지암정자 세웠으니 / 芝巖亭子碧溪潯 남전에 감춘 자취 만년 계책 깊었네 / 屛跡藍田晩計深 지금도 말한다네 청평산 아랫길에 / 尙說淸平山下路 황소 타고 옛 송림 지나간 일 / 黃牛叱過古松林
○ 모진도(牟津渡)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모진도 어구가 바로 원당인데 / 牟津渡口是員塘 사공은 삿대를 버티고 손님맞이에 분주하네 / 小豎撑篙接客忙 바라보니 인가는 산마루에 붙여 있어 / 試看人煙依絶巘 풍경이 옛날 본 봉명방과 흡사하네 / 風謠恰似鳳鳴坊 전에 곡산(谷山)의 봉명방(鳳鳴坊)을 보았는데, 백성들의 마을이 모두 산마루에 있었다.
○ 저찰촌(鉏札村)을 지나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험악한 암석이 문득 열리니 / 矗石喦磝忽打開 진흙 논배미가 시내를 끼고 돌았네 / 塗泥萬㽝來溪回 이랴이랴, 소모는 소리 봄물을 갈아대니 / 鳴犁札札耕春水 산봉우리 향하여 화전불 놓으러 가지 않네 / 不向峯頭放火來
○ 이곡(梨谷)을 지나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이운 곡구에 작은 내 흐르고 / 梨雲谷口小溪長 입 속에서 녹는 특산 배나무 두어 줄 / 絶品含消立數行 길가 찔레꽃 눈앞에 가득한데 / 一路蒺藜花滿眼 가는 바람 술통 스쳐 주향을 풍기네 / 細風吹撲酒槽香
○ 창촌(倉村)에서 잠깐 쉬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작은 창고 쇠잔한 마을 기색이 처량한데 / 小廥殘村氣色涼 모를 심는 시절이라 으레 양식 분배하네 / 挿秧時節例頒糧 하늘에 가득한 소산기 뒤 능히 알리오 / 彌天蕭氣誰能辨 도호당 안에서는 도지개춤 흥겹네 / 都護堂中舞檠長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소산현(蕭山縣)의 아전들이 글장난을 잘하고 법문을 잘 농간질 하였는데, 왕 곡정(王鵠摀)은 모기령(毛奇齡)이 소산기가 있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오각(午刻 12시경)이 되어서야 출발하였는데, 나는 늙은 암소를 타고 약암(約菴)은 조그마한 가마를 타고 연(淵)은 나귀를 타고 경지(景祉)와 유청(唯靑)은 모두 말을 탔다. 화우령(畵牛嶺)을 넘어 하나의 냇물을 건넜는데 바로 곡운(谷雲)의 하류이다. 또 산령(蒜嶺)을 넘어 제 1곡(第一曲)인 방화계(傍花溪)에서 잠시 쉬고 곧바로 달려 곡운서원(谷雲書院)에 이르렀다. 여기서 방향을 바꾸어 사내창(史內倉)에 가서 잤다. ○ 화우령을 넘으면서 서쪽을 바라보니, 뭇 산봉우리가 군집하고 연기와 아지랑이 낀 산빛이 짙게 푸르른데 벌써 곡운 외부(外府)가 보인다. 몇 리를 더 가서 십감촌(十甘村) 마을 앞에 이르니, 절벽 위에 낙락장송이 나열해 섰고, 굽이치는 냇물을 내려다보니 맑은 물빛이 눈부시었다. 또 하나의 산모퉁이를 돌아 서쪽 산기슭을 보니 층암절벽이 깎아 세운 듯하고 폭포가 흘러내렸는데 마치 소낙비가 오는 때 같이 자못 볼 만한 경관이었다. 또 하나의 산모퉁이를 돌아 산령을 만났는데, 영세(嶺勢)가 몹시 험준하고 산봉우리가 마치 꽃잎처럼 생겨 상봉(上峰)이 되었다. 그 이름은 과연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 산마루에 오르니 곡운구곡(谷雲九曲)이 눈앞에 삼열(森列)하였다. 좌우의 산세는 마치 견아(犬牙)처럼 짜여들고 옷깃처럼 교접하여 그 주밀한 형세가 빈틈이 없었다. 과연 하늘이 만든 명구(名區)로서 특별한 하나의 고안을 완성한 것이라 우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 산봉(蒜峯)은 곧 곡운의 외관(外關)이다. 이 영을 넘자 물은 한층 더 맑고 돌은 한층 더 희고 산은 한층 더 높고 초목은 한층 더 울창하다. 고개 아래에 내려와 얼마 안 가서 문득 비스듬히 누운 커다란 반석이 보이는데 거기에 비류(飛流)하는 물결이 허옇게 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물어보니 바로 제1곡의 방화계(傍花溪)였다. 흔연히 말에서 내려 가까이 보니 기기 괴괴한 형태를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쳐다보니 해는 이미 산봉우리에 걸려 있고 호랑이와 곰이 울어댔다. 오래 머무를 수 없어 드디어 모두 말에 올랐다. 명일에 구곡(九曲)을 자세히 보기로 의논하고 청류격단(淸流激湍)을 지날 때마다 문득 말을 달려 지나게 하였으니, 이는 혹시라도 절경에 이끌려 날이 어두울 때까지 지체될까 염려되어서였다. 들길이 몹시 험악하였다. 때로는 나무로 잔도를 만들어 평탄하다가도 조금 가면 다시 또 험악하곤 하였다. 2ㆍ3곡 이상으로부터는 험한 돌길이 점점 평탄해지고 산세도 점차 낮아졌으며, 5ㆍ6곡 이상에 이르러서는 산줄기가 끝나고 뽕밭과 삼[麻]밭들이 있었다. 다시 1곡을 돌아 서원(書院)에 이르렀는데 서원의 형색이 몹시 쓸쓸하였다. 또 다시 돌아 창촌(倉村)을 향하여 명월계(明月溪)를 건너서 우편으로 꺾어 드니, 이른바 융의연(隆義淵)ㆍ첩석대(疊石臺)가 있었는데 모두 길가에 있어 아름다운 경관도 없었거니와 또한 날이 어두워지므로 말을 달려 지나쳐 버렸다.
○ 화우령을 넘으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숲과 풀 어우러져 분별할 수 없는데 / 疊綠稠靑漭不分 막대머리 한 고개에 또 구름 비껴있네 / 杖頭一嶺又橫雲 문득 도흥경을 생각케 하니 / 令人却憶陶弘景 금롱보다 풍초를 좋아한 줄 알겠네 / 豐草金籠識所欣
○ 산령을 넘으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한 겹산에 어울려 또 한겹산 달리는 ‘속안으로 외람되이 간산함을 미워하여 [生憎俗眼猥 着山]’라 하였다 / 一重山合一重山 하늘이 선계를 위해 철관을 튼튼히 했네 / 天爲仙區壯鐵關 정신차려 이곳을 지나가긴 하지만 / 只以銳心過此去 어떻게 돌아갈지 까마득하네 / 不知何計得回還
○ 동구(洞口)로 들어가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산으로 접어들면서 굽이굽이 맑으니 / 自入山來曲曲淸 무어라 부를 수 없거니와 모두 이름이 없네 / 不勝名矣盡無名 속진에 막힌 심장 깨끗이 씻기우고 / 塵脾俗肺澄淘了 또다시 꾀꼬리 소리에 귀를 깨치고 / 又聽黃黧砭耳聲
○ 또 다음과 같다.
바람고개 몸을 솟구쳐 지나가니 / 風磴㩳身度 높은 봉우리는 이마 눌러 비껴 있네 / 危峯壓頂斜 시냇가엔 곰이 꺾은 나무 비껴 있고 / 溪橫熊折木 길가엔 사슴이 씹던 꽃잎 떨어졌네 / 徑落鹿銜花 고달픈 땅이지만 맑은 정신나고 / 苦境生淸想 천작의 경관에 자주 차탄을 발하네 / 天工發絫嗟 이래로 광달한 선비 / 由來曠達士 늙어 죽도록 집 생각 아니하네 / 終老不懷家
○ 약암의 시는 다음과 같다.
돌길이 강 서쪽에 비꼈는데 비록 구곡(九曲)이라곤 하지만 길이 한쪽 가로나 있어 한번도 냇물을 건너지 않는다. / 磴路橫斜著水西 녹음 속의 꾀꼬리 맘놓고 울어대네 / 綠陰幽鳥盡情啼 옆 사람이 웃으며 곰 지난 곳 가리키니 / 傍人笑指能熊過跡 꺾인 나뭇가지 시내에 쳐박혀 있네 / 折木杈枒倒碧溪
○ 또 다음과 같다.
마늘봉 뒤에 곡운이 열렸는데 / 蒜峯以後谷雲開 구곡의 선경 거쳐 왔네 / 九曲仙莊領略來 보건대 조물주가 그 기교를 다해 / 試着化工勞意匠 수석을 갈아 신기한 작품을 만들었네 / 磨礱水石有神裁
22일. 약간 흐렸다가 오정이 지나서야 개었다. 일찍 출발하여 서원에 도착하여 여러분들의 화상을 본 다음 차례로 구곡을 보았다. 제1곡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저녁 때 두 고개를 넘어 외창(外倉)으로 돌아와 잤다. ○ 서원은 사액(賜額)되지 않은 곳으로, 곡운(谷雲) 김공(金公) 휘는 수증(壽增)이다. 이 주벽으로, 삼연(三淵 김창흡의 호) 김공(金公)이 좌배(左配), 명탄(明灘 성규헌(成揆憲)의 호) 성공(成公)이 우배로 앉았다. 또 그 왼편 재실에 두 분의 화상를 봉안하였는데 곡운과 삼연 두 분의 진영(眞影)이며, 오른편 재실에 또 두 본의 화상을 봉안하였는데 곧 제갈 무후(諸葛武侯)와 매월당(梅月堂) 김공(金公)의 진영이다. 또 궤속에 두 분의 화상을 간직하였는데 우암(尤菴 송시열의 호) 송 문정공(宋文正公)과 곡운(谷雲) 의 아들 성천공(成川公)의 진영이다. 서루(書樓)에 또 공자(孔子)의 화상을 간직하였는데, 동지(東紙 한지)에 먹으로 그린 것으로서 마치 어린아이들의 붓장난 같아 머리를 말[斗]보다 크게 그렸으니 이는 곧 하목해구(河目海口)를 형상한 것이나, 당장 없애 버려야지 그대로 둘 것이 못되었다. 그 나머지의 모든 화상은 약암(約菴)의 예알(禮謁)로 인해 같이 따라 들어가 상세히 보았는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머리는 깎고 수염만 있으며 쓴 것은 조그마한 삿갓으로서 겨우 이마를 가릴 정도였고 갓끈은 염주(念珠) 같았다. 곡운은 우아하고 후중한 체구에 사모를 쓰고 검은 도포를 입어 조정 대신의 기상이 있었다. 우암(尤菴)은 74세 때의 진영(眞影)으로서 수발(鬚髮)이 모두 희고 아랫입술은 선명하게 붉었으며 치아가 없으므로 턱은 짧았고 눈빛은 광채가 나서 1천 명을 제압할 만한 기상이 있었다. 삼연은 청화정숙(淸和整肅)하며 복건에 검은 띠를 띠고 있어 산림 처사(山林處士)의 기상이 있었다. 제갈 무후(諸葛武侯)는 삼각 수염에 이마는 뾰족하고 빰은 활등같이 그려 마치 불화(佛畫)의 명부상(冥府像) 과 같았다. 이것은 당장 없애 버려야지 그대로 둘 것이 못된다. 이곳에 와룡담(臥龍潭)이 있다 해서 무후의 진영을 걸어 놓았으나 아무런 의의도 없다. 이는 모두가 비천한 습속으로서 과감히 없애야 한다.
서원 안에 곡운 화첩(谷雲畵帖)이 있는데 9곡의 천석(泉石)을 그린 것으로서 그린 이는 조세걸 (曺世傑)이었고, 제어(題語)는 곡운이 지었다. 무이도가(武夷櫂歌)의 운(韻)을 곡운이 제창하고 여러 자질(子姪)들이 각각 1곡씩 읊은 것인데 모두가 그의 수필(手筆)이다.
○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절경이라 성령 수양 알맞은데 / 絶境端宜養性靈 만년의 심적은 맑은 풍월 즐길 뿐이네 / 暮年心跡喜雙淸 백운산 동쪽 화산 북쪽이라 / 白雲東畔華山北 굽이굽이 시내소리 귀에 가득 들려오네 임신년 봄에 운옹(雲翁) / 曲曲溪流滿耳聲
○ 일곡이라, 좁은 동천 배도 용납하기 어려운데 / 一曲難容入洞船 복사꽃 피고지는 운천이 막혀 있네 / 桃花開落隔雲川 숲 깊고 길 끊겨 찾아오는 이 드문데 / 林深路絶來人少 어느 곳 선가에 개 짖고 연기이나 / 何處仙家有吠煙
운옹(雲翁)○ 1곡은 방화계(傍花溪)인데 서오촌(鉏鋙村)으로부터 서쪽으로 돌아 오리곡(梧里谷)을 지나 하나의 시내를 건너는데, 이것이 곧 곡운동구(谷雲洞口)이다 산현(蒜峴)을 넘으면 산수가 두루 돌고 수석이 맑고 장엄하니 이것을 방화계라 한다.
○ 이곡이라, 우뚝한 산 옥봉을 이뤘는데 / 二曲峻嶒玉作峯 흰 구름 누른 잎 가을 경치 이루었네 / 白雲黃葉映秋容 돌다리 가노라니 신선집이 가까워라 / 行行石棧仙居近 알랴 소란한 진세 천만중 막혔음을 / 已覺塵喧隔萬重
아들 창국(昌國)○ 2곡은 청옥협(靑玉峽)으로서 화계(花溪)로부터 5리를 지나 하나의 산을 돌면 석잔(石棧)이 옆으로 비껴 있어 좌측으로 위험한 시내를 내려다보게 되고 우측으로 층층이 높이 솟은 봉우리를 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청옥협이다.
○ 삼곡이라, 신선 자취는 밤배가 아득한데 / 三曲仙蹤杳夜船 빈 누대에 송월만이 스스로 천년일레 / 空臺松月自千年 청한한 정취 초연히 깨쳤나니 / 超然會得淸寒趣 흰 돌 나는 여울 너무도 아름답네 / 素石飛湍絶可憐
종자(從子) 창집(昌集) ○ 3곡운 신녀협(神女峽)인데, 옥협(玉峽)을 지나 약간 벌어지는 듯 이 시냇물을 따라가면 여기에 이르게 된다, 옛날 이름은 기정(妓亭)이다. 그래서 내가 신녀협(神女峽)이라고 하였다. 물위에 매월당(梅月堂)의 유적이 있다.
○ 사곡이라. 푸른 바위 의지해 내를 내려볼제 / 四曲川觀倚翠巖 가까이 솔 그림자 삼삼히 떨어지네 / 近人松影落毿毿 분류하는 물거품 그칠 때가 없어 / 奔潨濺沫無時歇 언제나 구름기운 못 위에 넘실대네 / 雲氣尋常漲一潭
종자(從子) 창협(昌協) ○ 4곡은 백운담(白雲潭)인데, 여협(女峽)으로부터 작은 시내를 건너 한 언덕을 돌아서 시내를 따라가면 여기에 이르게 된다.
○ 오곡이라, 시내 소리 깊은 밤에 더 좋아 / 五曲溪聲宜夜深 패옥처럼 쟁쟁하여 먼 숲을 울리네 / 鏘然玉佩響遙林 송문을 벗어나니 서리 언덕 고요한데 / 松門步出霜厓靜 둥근달 외로운 거문고 세상 밖의 심경일세 / 圓月孤琴世外心
종자(從子) 창흡(昌翕) ○ 5곡은 명옥뢰(鳴玉瀨)로서 운담(雲潭) 수백 보 위에 있다. 산밑에 두어 집 가복(家僕)이 살고 있다.
○ 육곡이라, 그윽한 집 푸른 물굽이 베개 삼아 / 六曲幽居枕綠灣 일천 자 깊은 못 그림자 솔문을 비치네 / 深潭千尺映松關 잠긴 용 풍운의 일 관여하지 않고 / 潛龍不管風雲事 깊은 물속에 오래 누워 스스로 한가롭네 / 長臥波心自在閒
아들 창직(昌直) ○ 6곡은 와룡담(臥龍潭)인데 명옥뢰(鳴玉瀨)와 서로 접해 있다. 버들숲가에 물이 쌓여 맑고 깊다. 서쪽으로 농수정(籠水亭)을 바라보면 은연히 송림(松林) 사이에 비친다.
○ 칠곡이라, 평평한 못 얕은 여울 연했는데 / 七曲平潭連淺灘 맑게 이는 잔물결 달을 향해 볼만하네 / 淸連堪向月中看 산도 비어 고요한 밤 지나는 사람없고 / 山空夜靜無人度 소나무 그림자만이 물속에 들어 차갑네 / 唯有長松倒影寒
종자(從子) 창업(昌業) ○ 7곡은 명월계(明月溪)인데 영당(影堂) 앞에 있다.
○ 팔곡이라, 맑은 못 넓게도 열렸건만 / 八谷淸淵漠漠開 이따금 구름 그림자 홀로 오르내리네 / 時將雲影獨沿洄 참 근원 지척이라 맑고 밝음 유별나니 / 眞源咫尺澄明別 오가는 피라미떼 앉아서도 보이누나 / 座見儵魚自往來
종자(從子) 창즙(昌緝) ○ 8곡은 융의연(隆義淵)인데, 영당(影堂) 서쪽에 있다.
○ 구곡이라, 암벽이 층층한데 / 九曲層巖更嶄然 겹벽이 대를 이뤄 맑은 내에 비치네 / 臺成重壁映淸川 흐르는 여울물 솔바람과 급하니 / 飛湍暮與松風急 그 울림소리 동천에 가득 요란하네 / 靈籟嘈嘈滿洞天
외손(外孫) 홍 유인(洪有人) ○ 9곡은 첩석대(疊石臺)이다. 또 서쪽으로 돌아가게 되면 좌우에 암석이 기괴하고 물이 그 사이로 쏟아져 내린다. 조금 올라가면 조그마한 탑이 있고, 그 가에 길이 있으니 백운령(白雲嶺)으로 향하게 된다.
○ 또 농수정(籠水亭)에 써 이르기를,
“청람산(靑嵐山) 한 가닥이 구불구불하게 뻗어내려 지세가 평탄하고 물은 만궁형(彎弓形)으로 돌았는데, 우리 집이 그 사이에 있어 화악산(華嶽山)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시냇가에 붙여 농수정(籠水亭)을 지었는데 동쪽으로 와룡담(臥龍潭)을 바라보게 된다.”
하였다. ○ 농암(農巖)이 부지암기(不知菴記)를 지어 이르기를,
“농수정(籠水亭)으로부터 남쪽으로 4~5리를 가 화악산(華嶽山) 깊은 골짜기 속에 들어가서 나무를 베어내고 언덕을 평평하게 하여 그곳에 초막을 짓고 사니, 산수가 첩첩하여 사람들이 사는 곳과는 더욱 멀다. 이것을 일러 부지암이라 한다.”
하였다. ○ 또 삼일정기(三一亭記)에는 이르기를,
“정자가 곡운(谷雲)의 화음동(華陰洞)에 있으니 우리 백부께서 지으신 것이다. 어찌하여 삼일정이라 이름하였는가? 기둥은 셋이고 대들보가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 원노(院奴)가 말하기를,
“화음동(華陰洞)에 복희팔괘(伏羲八卦)와 문왕팔괘(文王八卦)를 새긴 돌이 있다.”
고 하니, 이것이 바로 삼일정에 있다. 바빠서 가 볼 수 없으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열수(洌水) 정약용(丁若鏞)은 다음과 같이 기(記)를 쓴다.
첩석대(疊石臺)는 원(院)의 서쪽 1리가 되는 곳에 있다. 물속에 3~4개의 선돌이 있어 그 크기가 마치 비석만큼씩이나 한데, 두어 겹의 횡문(橫紋)이 있고 위에는 사람이 앉을 수가 없다. 좌우는 편편한 밭과 큰길로서 그늘을 이룰 만한 수목이 없으니, 이곳은 아마도 은사(隱士)를 수용하지 못할 것 같다. ○ 융의연(隆義淵)은 그 하류 수백 보 위치에 있다. 위에는 화전(火田)이 있고 곁에는 보리밭이 둘려 있어 기괴한 암석도 없고 그늘을 이룰 만한 수목도 없다. 다만 시냇물이 흐르다가 정체한 곳일 뿐인데, 무엇 때문에 구곡(九曲)에 끼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 명월계(明月溪)는 원촌(院村) 앞에 있다. 우마견시(牛馬犬豕)의 오염과 티끌의 잡된 것의 그 어지러움과 더러움을 형언할 수 없으며, 대교(大橋)가 걸쳐 있음으로써 수석이 오염되어 있으니, 이곳 역시 구곡에 넣기에는 불가한 곳이다. ○ 대개 와룡담(臥龍潭) 이상으로부터는 산세가 비속하고 물의 흐름이 또한 세차지 못하다. 그리고 뽕밭, 삼[麻]밭, 느릅나무, 버들 등의 그늘과 빽빽한 밭 도랑과 가옥들은 이미 인간의 속물이다. 다만 당시 정자가 여기에 있었고 이 노인이 늘 멀리 노닐 수 없어 보통 여기에 발걸음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상의 3곡이 외람되이 9곡의 수를 채우게 된 것이다. 주자(朱子)의 무의도가(武夷櫂歌)도 7곡(七曲)ㆍ8곡(八曲)에 이르러서는 아름다운 경치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7곡의 벽탄창병(碧灘蒼屛)과 8곡의 고루기암(鼓樓寄巖)이 오히려 취할 만한 것이 있었고, 9곡에 이르러서는 상마우로(桑麻雨露)의 별다른 인간 세계가 있다고 하였다. 이 사례로 미루어 보면 의당 와룡담(臥龍潭) 으로 제9곡을 삼아 평천(平川)의 입시(入始)로 여길 것이요, 그 정자나 마을 이상은 아마도 다시 취하는 것이 마땅치 않을 것 같다.
또 다음과 같이 기(記)를 쓴다.
○ 와룡담(臥龍潭)은 정자 터[亭墟]의 남쪽에 있는데, 언덕 아래 석벽(石壁)과 창병(蒼屛)이 없다. 그 주위는 1백 보에 불과하고 그 깊이 또한 물밑이 검도록 깊어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역시 아름답기는 하다. ○ 명옥뢰(鳴玉瀨)는 곧 모여 있던 담수(潭水)가 쏟아져 내리는 곳이다. 반석이 넓게 깔리고 놀치는 물결이 구렁으로 달림으로써 옥설(玉雪)이 함께 일어나고 풍뢰(風雷)가 서로 부딪혀 진동한다. 여울물로서는 극히 아름다운 경관이다. ○ 백운담(白雲潭)은 마땅히 9곡 중 제1의 기관(奇觀)이 되어야 한다. 반석이 넓게 깔려 1천여 명이 앉을 수 있고 돌빛은 순전한 청색에 아주 깨끗하다. 구렁으로 쏟아져 흐르는 물이 기괴하고 웅덩이에서 솟아 넘치는 기운이 언제나 흰 구름 같다. 북쪽 암벽 석면에 ‘백운담(白雲潭)’ 세 자를 새겼는데 초서로 되어 있다. 그리고 또 귀인(貴人)들의 이름을 새긴 것이 많다. ○ 벽의만(碧漪灣)이란 내가 지은 이름이다. 백운담 아래 1리 되는 곳에 있는데, 두 언덕의 장송(長松)들은 암벽을 의지해 섰고 맑고 긴 물줄기에 넓은 녹색 수면을 이루었다. 아래 화계(花溪)로부터 위로 용담(龍潭)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평평한 물이 없으니 이 또한 조물주의 기교라, 꼭 비류 급단(飛流急湍)이라야 선택에 드는 것이 아니다. 여기는 고기잡이도 할 수 있고 배도 띄울 수 있는 곳이라 조그마한 배 한 척을 마련해 두고 풍월(風月)을 맞아 즐기기에 알맞다. 만약 9곡에서 이것이 없었다면 기변(奇變)을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다. ○ 신녀협(神女峽)은 벽의만(碧漪灣) 동쪽 한 화살 사정거리에 있어 상ㆍ하 두 웅덩이를 이루었는데, 위에 있는 웅덩이는 명옥뢰(鳴玉瀨)와 견줄 만하고 아래 있는 웅덩이는 너무나 기괴하여 형언할 수 없다. 양쪽의 언덕이 깎아지른 벽립(壁立)의 협곡이 아닌데도 협(峽)이라고 이른 것은, 대개 그 웅덩이의 형체가 마치 두 언덕으로서 협(峽)을 이룬 것 같기 때문이다. 우레소리가 나고 눈처럼 흰 물결이 용솟음치며 돌 색깔 또한 빛나 반들반들하다. 과연 절묘한 구경거리이다. ○ 청옥담(靑玉潭) 담(潭)은 본래는 협(峽)으로 썼다. 또 신녀협 밑에 있어 맑은 못의 검푸른 그 물빛이 마치 청옥과 같으며, 북쪽 언덕의 넓다란 반석이 노닐 만하다. 그 물이 깊기로는 의당 9곡 중에 첫째가 될 것이며, 또한 배를 띄울 만하다. ○ 망단기(望斷碕)는 내가 선택한 곳이다. 청옥담 밑으로 산모퉁이 하나를 돌면 바람을 일으키는 여울과 눈처럼 허옇게 일어나는 물이 있어 참으로 즐길 만하며, 넓다란 반석이 펑퍼짐하게 깔려 수백 명이 앉을 만하다. 그 위에 또 벽력암(霹靂巖)이 있는데, 높고 기이하여 과연 놀라운 경관이다. 이곳은 본명이 망단기(望斷碕)인데, 등로(磴路)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험하여 앞으로 나아갈 길이 끊어져 있음을 이른 말이다. 내가 약암(約菴) 등 여러 사람과 이곳에서 발을 씻었다. ○ 설벽와(雪壁渦)는 내가 지은 이름이다. 망단기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한 모퉁이의 산을 돌면 바람을 일으키는 급류가 허연 물거품을 이루어 놀랍고도 즐길 만하다. 북쪽 언덕에 병풍처럼 두른 석벽이 옥설(玉雪)처럼 희고 석함(石陷)은 마치 절구통과 같아 설구와(雪臼渦)라 이름할 수도 있고 또 설벽와(雪壁渦)라 이름할 수도 있다. 또 그 밑으로 한 굽이를 돌면 여울물이 허연 물방울을 튀기면서 흘러 아끼며 즐길 만하다. 또 평평히 흐르는 물속에는 거북처럼 생긴 돌이 있어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북쪽으로 꼬리를 두었으며, 물가에 흰 반석이 넓게 깔려 있어 1백여 명이 앉을 수 있다. 내가 또 그것을 이름하여 영귀연(靈龜淵)이라 하였다. ○ 방화계(傍化溪)는 영귀연 아래 3~4 굽이를 지나 있다. 이는 곧 이를테면 악곡(樂曲)을 끝맺는 마지막 연주처인데, 저쪽으로부터 오는 사람은 악곡의 처음을 삼을 것이다. 북쪽 언덕에 큰 반석이 넓게 깔려 수백 명이 앉을 만하고, 그 아래층에 또 하나의 큰 반석이 있어 색깔은 희고 수백 명이 앉을 만하다. 남쪽 언덕은 허옇게 보이는데 모두가 풍림석벽(風林石壁)으로서 시냇물은 그 돌 위에서부터 흘러내려 절벽으로 달린다. 그러므로 천둥소리가 일어나고 허연 물이 용솟음쳐 공포를 느끼고 탄성을 발하게 하니, 이곳은 곧 백운담과 백중(伯仲)이 된다. 그 위는 맑은 못을 이루어 몹시 깊고 또 하나의 와폭(臥瀑)이 천둥소리를 내면서 이 못으로 달리며, 그 위에 또 하나의 급한 여울이 쏟아져 흐른다. 이는 바로 3곡이 합쳐 1곡이 된 것이다.
이날 절승한 경관을 당할 때마다 반드시 말에서 내려 물가에 앉아서 혹은 술을 부어 서로 권하기도 하고 혹은 담배를 서로 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양치질도 하고 발도 씻으면서 오르내렸으니, 이는 대개 특별히 선택한 세 곳으로 7ㆍ8ㆍ9곡의 탈락을 보충하려는 생각에서였다. 방화계(傍花溪) 위에 도착한 후 의논하여 개정하기를 ‘1곡은 망화계(網花溪), 이 땅이 마치 도원동구(桃源洞口)와 같기 때문에 방(傍)을 고쳐 망(網)으로 하였다. 2곡은 설벽와(雪壁渦), 새로 첨가한 것이다. 3곡은 망단기(望斷碕), 혹은 2곡을 영귀연(靈龜淵), 3곡을 설벽와(雪壁渦)라 하고 망단기는 취하지 않았다. 4곡은 청옥담(靑玉潭), 협(峽)을 고쳐 담(潭)으로 하였는데, 본래는 제 2곡이다. 5곡은 신녀회(神女匯), 협(峽)을 고쳐 회(匯)로 하였는데, 본래는 제 3곡이다. 6곡은 벽의만(碧漪灣) 새로 첨가하였다. 7곡은 백운담(白雲潭), 본래는 제 4곡이다. 8곡은 명옥뢰(鳴玉瀨), 본래는 제 5곡이다. 9곡은 와룡담(臥龍潭), 본래는 제 6곡이다. 이라고 하였으니, 이제야 명실 상부하다 하겠다. 대개 방화계 위로부터 청옥협에 이르기까지 6~7리 사이는 굽이마다 기절(奇絶)한데도 모두 빼놓고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백운담(白雲潭) 상은 소나 먹일 곳에 불과한데도 3ㆍ4ㆍ5ㆍ6곡이 속속 잇닿았으며, 7ㆍ8ㆍ9곡에 이르러서는 외람되이 화려한 선택에 끼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마치 재덕을 갖추지 못한 귀척근신(貴戚近臣)이 함부로 공경(公卿)의 자리를 차지하고 초야에 묻혀 있는 자는 훌륭한 포부를 품고도 늙어죽도록 버림을 받는 것과 같아 결코 순리가 아니다. 그리하여 삼가 고쳐보기를 이와 같이 하였는데, 비록 경솔한 처사로서 두렵기는 하나 공의(公議)에 있어서는 또한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요약해 말하면, 곡운(谷雲)은 사방이 막힌 지역으로서 중간에 기름진 들이 열려 오곡이 잘 익는데 주위는 수십 리가 된다. 춘천(春川)으로부터 오는 길이 이처럼 험준하기로, 영평(永平) 길을 물어보니 그 험준한 것이 배나 더하다고 한다. 참으로 은자(隱者)가 거처할 곳이요 또 난세에 생명을 보전할 곳이다.
이날 의논하기를 ‘내창(內倉)과 외창(外倉)의 거리가 비록 30리 밖에 되지 않지만 절험(絶險)한 두 고개를 넘고 9곡의 기절한 경치를 보자면 하루를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드디어 새옹 하나를 빌리고 쌀 한 전대를 싼 다음, 노복들이 먹을 밥과 말 먹일 콩을 모두 준비해 가지고 계류(溪流)를 따라 내려가다가 제 1곡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이때 마침 고기를 낚는 자가 있어 그에게 고기 한 꿰미를 사서 놀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날은 기절한 경관을 탐색하고 응접하기에 겨를이 없어 시는 한 수도 짓지 못하였다.
23일. 맑음. 일찍 출발하여 서오촌(鉏鋙村)을 지나 문암서원(文巖書院)에서 점심을 먹고, 배를 타고 수운담(水雲潭)에 와서 다시 말을 타고 소양정(昭陽亭)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 마령(馬嶺)을 넘어 인람역(仁嵐驛) 앞에 이르니 몸이 피곤하고 뼈대가 쑤시었다. 멀리 바라보니 강중에 조그마한 배 세 척이 떠내려오고 있었다. 말 위에서 서로 돌아보고 이르기를,
“우리의 본의는 배를 타고 서오천(鉏鋙川)에 이르러 낭천(狼川) 근원을 엿보려 하였는데, 여울이 험악하여 오르기 어렵기 때문에 끝내 말을 타고 가게 된 것이다. 지금 저 배를 타고 낭천물에 뜨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하고, 말을 빨리 달려 침목천(梣木遷)을 넘어 문암서원(文巖書院)에 이르러 종자(從者)로 하여금 배를 끌어대게 하였는데, 이른 다음에 보니 바로 가노(家奴) 용운(龍雲)의 배였다. 드디어 소아탄(小兒灘)에서 배에 올라 보통천(普通遷)을 지나는데 약간의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빙빙 도는 파문은 수면에 퍼져나가고 연운(煙雲)이 아득하게 끼어 그 청원(淸遠) 경치는 자못 정신을 맑게 하였다. 물 서쪽에 큰 마을이 있으니 이는 곧 서하(西下) 최씨(崔氏)들이 사는 곳이다. 동쪽으로 수운담(水雲潭)에 정박하니, 이곳은 수륙(水陸) 상인들이 모여 드는 지역으로 들어가 보니 좋은 술과 아름답게 단장한 계집이 마치 충주(忠州)의 목계(木溪)와 같았다.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어 곧바로 말을 타고 정하(亭下)에 이르니 마치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대림(大林)이 그 유모(乳母)와 함께 와서 만났다.
24일. 짙은 안개가 끼었다Ⰰ 진시(辰時)가 되어서야 비로소 걷혔다. 소양정 밑에서 배를 타고 마당포(麻當浦)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금허(金墟)에서 잤다. ○ 소양정 아래에서 출발하여 맑은 못 한 굽이를 돌아 병벽탄(洴澼灘)으로 내려왔다. 올라올 때에는 10여 명이 배를 끌어 올리던 곳을 순식간에 지난 것이다. 또 맑고 깊은 물 한 굽이를 지나 노고탄(老姑灘)으로 내려왔는데, 그 북쪽이 곧 서하평(西下平)이다. 또 몇 리의 맑고 깊은 물길로 곡장탄(曲匠灘)에 내려왔는데, 흰모래가 눈부시게 빛나고 그 동쪽에 죽전촌(竹田村) 40여 호가 있었다. 또 한 굽이를 돌아 아올탄(阿兀灘) 병탄(幷灘)이라 부르기도 한다. 으로 내려왔는데, 이는 바로 소양수(昭陽水)와 모진수(牟津水)가 서로 합류하는 곳으로서 지금까지 10리를 내려온 것이다. ○ 두 물이 합하여 담수(潭水)는 매우 깊다. 또 한 굽이를 떠내려가니 여기가 곧 신연도(新淵渡)이다. 새로 오는 부사(府使) 김희화(金熙華)가 오늘 부임하는데 이미 배에서 내려 가버렸다. 여기서부터 물결이 세차기는 하나 여울을 이루기까지는 못하였다. 또 한 굽이를 돌아 아자탄(啞者灘)에 내려오는데 쏜살처럼 지나가는데도 꽤 먼 거리였다. 삼악(三嶽)이 가까이 닥쳐옴에 뭇 산봉우리들이 언뜻언뜻 지나가 진정 상쾌하였다. 또 한 굽이를 떠서 내려가니 여기가 바로 우수탄(右手灘)이다. 배가 석문(石門) 밑을 지날 때 암벽을 쳐다보니 그 기괴하게 높이 선 것이 마치 사람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또 한 굽이를 돌아 교탄(橋灘)으로 내려가니 여기가 바로 칠암촌(漆巖村) 앞으로서, 여기까지는 또 10리를 온 것이다. ○ 호로탄(葫蘆灘) 쇠오항(衰吾項)ㆍ학암탄(鶴巖灘)으로 내려가니 물길이 굽이쳐 북쪽에서 가다가 서쪽으로 꺾어져 현등협(懸燈峽)으로 내려가는데 그 길이는 10여 리나 되었고, 협(峽)이 다하자 동부(洞府)가 깊숙하여 미원(迷源)과 같고 골짜기 물들이 흘러 들어오니 바로 춘천의 남부이다. 또 서쪽으로 한번 돌아 종당촌(宗塘村)을 지나서 차석탄(磋石灘)으로 내려갔는데, 윗여울은 극히 얕았고 아랫여울은 자못 험악하였다. 정족탄(鼎足灘)으로 내려갔는데 검은 돌이 바둑돌처럼 널려 있고 물길은 그리 급하지 않았다. 마당촌(麻當村)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는데, 마을 북쪽에 골짜기가 있으니 이는 곧 석파령(席破嶺)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여기까지는 또 20리를 온 것이다.
또 한 굽이를 떠내려와 안보(安保)의 큰 마을을 지나니, 물 서쪽에 있다. 김청성(金淸城) 집안의 선묘(先墓)가 있었다. 양쪽 언덕에는 송림(松林)이 울창하고 강물은 매우 얕아 나무꾼들이 도보로 건너다녔다. 또 10여 리를 내려가니 물 서쪽에 두 마을이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위는 춘천(春川)에 속한 줄길(茁吉)이고, 아래는 가평(加平)에 속한 줄길(茁吉)인데, 글자로 풀이하면 줄(茁)은 방(錺)이 된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방천(錺遷)이라 하였다. 이곳이 경기(京畿)와 강원(江原)의 경계이다. 등로(磴路)가 몹시 길어 물 서쪽에 있다. 10여 리를 뻗쳤으니 이것이 이른바 초연대천(超然臺遷)이다. 등로의 초입에 작탄(鵲灘)이 있고 등로가 끝나는 곳에 곡갈탄(曲葛灘)이 있는데, 돌이 험하고 여울이 거세어 물결이 집채 같이 높았다. 우측으로 가평의 물을 지나니 그 동쪽은 석지산(石芝山)이다. 석지산에 이르기 전에 동쪽으로 벌어진 골짜기가 있어 그 속이 몹시 깊으니, 이를 장자곡(莊子谷)이라 하여 아직도 사람이 그 깊은 곳에 살고 있다. 또 한 굽이를 돌아 안반탄(安盤灘)으로 떠내려가니 그 동쪽은 바로 남이점(南怡苫)이다. 또 한 굽이를 돌아 염창탄(鹽倉灘)으로 내려가니, 그 아래 두 곳의 조그마한 여울이 있는데 모두 이름이 없다. 또 몇 리를 떠서 수원탄(戍原灘)으로 내려가니 그 동쪽이 바로 구곡(臼谷)이다. 방아올(方阿兀) 또 산 한 모퉁이를 돌아 금허촌(金墟村)에 이르러 잤다. 마당으로부터 금허(金墟)까지 30리이다. 이곳은 판서 이희갑(李羲甲)의 묘촌(墓村)이다. ○ 이날은 수로(水路)로 1백 20여 리를 행하였다.
곡갈탄을 내려가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사공이 재촉하여 뱃머리를 돌리니 / 篙師催轉尾 여울물은 재촉하여 뱃머리를 흔들어대네 / 湍水戰風檣 돌 위의 달리는 물 따르기 어려운데 / 奔石狂難趁 나는 봉우리 아득히 숨네 / 飛峯杳已藏 익숙한 사공 솜씨 경탄을 하고 / 斡旋驚手熟 안전하게 떠가는 몸 기뻐하네 / 平泛喜身康 내리뻗은 저 지산빛 / 迤邐芝山色 석양빛 띠어 고웁네 / 娟娟帶夕陽
○ 또 대련(對聯) 한 귀는 다음과 같다. 외로운 나무 몸을 돌려 멀리 나그네 피하고 / 獨樹轉身遙避客 어여쁜 봉우리 목을 빼어 배를 엿보네 / 娟峯擢頸俯窺船 말이 각박한 것 같아서 이어 짓지 않았다.
○ 또 강촌(江村)에 자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물에서 자는 것 일정한 곳이 없어 / 水宿無常處 배 매는 곳 바로 집이 되네 / 維舟卽有家 보리밭 사이 묵은 길로 들어가니 / 麥中荒徑入 느릅나무 아래 낮은 삽짝문 비꼈네 / 楡下短扉斜 개 짖는데 부엌에는 불이 빤하고 / 犬吠廚明火 누에 오르니 대자리엔 모래가 있네 / 蠶登簟有沙 무슨 이유로 속세를 떠나 / 何由去俗累 이처럼 생애를 보낼꼬 / 如是度生涯
25일. 맑음. 일찍 출발하여 10여 굽이를 지나 송의(松漪)의 반석에서 조반을 먹고, 굴운(窟雲)의 응암(鷹巖)에서 점심을 먹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부암(鳧巖) 아래 정박하였다. 금허(金墟)로부터 한 굽이 돌아 율현탄(栗峴灘)으로 내려가 유곡촌(柳谷村) 물 서쪽에 있다. 을 지났으니 여기는 장씨(張氏)들이 사는 마을이다. 복정곡(福亭谷)을 지나다가 그물질하는 어부를 보았는데 이들은 모두 귀족들이었다. 또 광탄(廣灘)ㆍ호로탄(葫盧灘) 쇠오항(衰吾項)으로 내려가니 약간의 여울이 졌다. 또 한 굽이를 내려가니 이곳은 정족탄(鼎足灘)으로서 물속에는 검은 돌이 개의 이빨처럼 박히었다. 또 한 굽이를 떠서 입천곡(笠川谷)을 지나니 녹효(綠驍)의 물이 흘러 들어간다. 그 밑은 바로 오장곡(鄔莊谷) 양근(楊根)의 북계이다. 으로서 유씨(柳氏)들이 살고 있다. 또 한 굽이를 돌아 배뢰탄(㾦癗灘) 두두래(斗斗來) 으로 내려가니 여울이 험하고도 길었다. 또 한 굽이를 떠서 엄인촌(閹人村) 물 서쪽에 있다. 을 거쳐 송의항(松漪港)에 배를 대고 반석 위에서 밥을 먹었다. 이상은 소양정(昭陽亭) 이하 24개의 여울이다. ○ 식사가 끝나자 뱃줄을 풀어 흑앵탄(黑櫻灘)《지지(地志》에는 화피탄(樺皮灘)이라 하였다. 으로 내려가니 물줄기는 만곡(彎曲)을 이루었고 물살이 몹시 거세었다. 자잠촌(紫岑村) 물 동쪽에 있다. 을 지나 병벽탄(洴澼灘) 발래탄(㗶唻灘)으로 내려가니 상ㆍ하 두 굽이가 있었다. 동쪽 물가 모래자갈밭 속에서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금을 채취해 일고 있었다. 주관자는 이씨(李氏)이다. 또 맑은 물길 몇 리를 내려가 호후판(虎吼阪) 물 서쪽에 있다. 을 지나고 고제탄(高梯灘)으로 내려가니 약간의 여울이 졌다. 이곳은 몇 리의 맑은 못을 이루었는데 그 서쪽이 고제천(高梯遷)이다. 사덕다리(沙德多里) 맑은 못이 끝나자 황공탄(惶恐灘)에 당도하였는데 배를 타고 지나기에는 위험스러웠다. 우측으로 청평(淸平) 물을 지나는데 마을 경치가 아름다웠다. 4~5인이 모래 속에서 금을 채취하고 있었다. 또 한 굽이를 내려 우분촌(牛墳村) 물 동쪽에 있다. 을 지나고, 또 한 굽이를 내려 원우천(遠于遷)을 거쳐 설곡촌(楔谷村) 물 동쪽에 있다. 을 지났는데, 이곳에는 노씨(盧氏)들이 산다. 또 약간 내려가 대동촌(大洞村)이 있으니 여기에는 남씨(南氏)들이 산다. 또 한 굽이를 돌아 장탄(長灘)으로 내려가 대성촌(大星村) 물 서쪽에 있다.ㆍ화랑촌(花郞村)을 지나는데, 밤나무숲이 몇 리에 뻗쳐 있다. ○ 또 한 굽이를 돌아 곡갈탄(曲葛灘)으로 내려가는데 물속에 숨은 바위가 많고 뱃길을 분별할 수 없어 사공이 몹시 두려워했다. 굴운역(窟雲驛) 양주(楊州)의 땅 자기막(瓷器幕)물 동쪽에 있다. 을 지났는데 이곳에는 이씨(李氏)들이 산다. 이덕사(李德師)의 일족이다. 응암(鷹巖) 또한 기이하여 볼 만하였다. 식사가 끝나자 출발하여 또 한 굽이를 돌아 검동촌(黔東村)물 서쪽에 있다. 을 거쳐서 남일원(南一園)에 이르고 마석뢰(磨石瀨)로 내려가는데 물살이 약간 거세었다. 수입촌(水入村) 무두리(蕪豆犂) 을 지나는데 마침 두 사람이 물가에 앉아 피리를 불고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 불러서 배에 같이 싣고 몇 리를 물 따라 내려가니 자못 적적한 심회를 달랠 만하였다. 신당촌(神堂村) 물 서쪽에 있다. 을 지나니 이곳은 바로 경성(京城)으로 통하는 대로(大路)이다. 공곡천(孔谷遷)을 지나 어시탄(魚腮灘)으로 내려가니 그 동쪽은 화죽곡(花竹谷)으로서 밤나무숲이 자못 길게 뻗쳐 있었다. 수죽곡(壽竹谷)을 지나 괘탄(卦灘)ㆍ유정탄(楡亭灘)으로 내려가 석담(石潭)물 동쪽에 있다ㆍ고랑촌(臯狼村)물 서쪽에 있다. 을 지나 십개탄(十開灘)상ㆍ하 두 굽이가 있다.ㆍ목탄(木灘)ㆍ대천탄(大千灘)으로 내려가서 초라담(鈔鑼潭)에 배를 대고 드디어 암하(巖下)에서 저녁을 먹은 다음 집으로 들어갔다. ○ 이날 수로로 1백 20리를 행하였다. ○ 송의(松漪) 이하가 또 12탄이다. 소양정 이하의 것을 모두 합치면 36탄이다. 그 이름을 상세히 기술하여 수로(水路)의 상고에 대비하였다.
금허(金墟)에서 새벽에 출발하면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밤 공기에 강물도 자라나서 / 夜氣江能養 거울 같이 맑은 물 잔잔하네 / 油然鏡面平 고요히 산빛을 머금어 푸르고 / 靜涵山色綠 멀리 새벽빛을 맞아 밝네 / 遠迓曙光明 엷은 안개 처음 피어올라 곱고 / 薄霧憐初起 가벼운 노 소리남이 애석하네 / 輕橈惜有聲 어떻게 지나가랴 저 동구 밖을 / 那堪洞天外 바람이 일어나 물살이 거세지네 / 風起怒濤生
26일 맑음. 전날 저녁에 약암(約菴)은 한(韓)ㆍ우(禹)ㆍ오(吳) 제생과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가기 위하여 두미(斗尾)에 나아가 잤는데, 협구(峽口)에서 바람을 만나 일찍 출발하였다.
28일 맑음.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를 수정하여 이틀 만에 마쳤다.
5월 1일. 산행일기(汕行日記)를 수정하여 4일 만에 마쳤는데 김종(金碂)이 도왔다.
4일. 약간 흐렸다. 곡운구곡시(谷雲九曲詩)를 추화(追和)하였는데, 무이도가(武夷櫂歌)의 운(韻)을 차운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티끌 세상 아무데도 심령 기를 것 없어 / 塵塗無物養心靈 유벽한 이곳에 맑은 수석 간직했네 / 僻處天藏水石淸 온갖 생각 얽힌 어지러운 곳에서 와 / 須從百慮交喧地 운산 폭포 소리에 깨우치네 / 醒記雲山瀑布聲
○ 망화계시(網花溪詩)는 다음과 같다. 일곡이라, 시냇가에 배를 매지 마라 / 一曲溪頭菓繁船 망화 비로소 달리는 내로 나가려 하네 / 網花纔肯放奔川 뉘 알리 백첩의 영원 안에 / 誰知百疊靈源內 푸른 산 기슭 곳곳에 연기가 날 줄을 / 靑起山根處處煙
○ 설벽와시(雪壁渦詩)는 다음과 같다. 이곡이라, 하늘을 나는 듯 아련한 산봉우리 / 二曲天飛縹緲峯 날아내리는 여울 위아래 다투어 단장하네 / 風湍上下競修容 구슬 병풍 옥벼랑 신선이 노닐던 곳 / 瑤屛玉壁仙游處 구름다리 건너놓아 한 겹이 막혔다네 / 已道雲梯隔一重
○ 망단기시(望斷碕詩)는 다음과 같다. 삼곡이라, 구당협은 배 물리치려 하는데 / 三曲瞿唐欲退船 봉산과 약수 도리어 아득해지네 / 蓬山弱水轉茫然 꼭대기길 바라보며 몇 사람이나 포기했나 / 幾人望斷碕頭路 머리 긁적이며 주저하는 모습 가련하기만 하네 / 搔首踟蹰也可憐
○ 청옥담시(靑玉潭詩)는 다음과 같다. 사곡이라, 맑은 물결 흰 바위 잠기는데 / 四曲澄泓浸雲巖 매달린 담쟁이잎이 간들간들 드리웠네 / 垂蘿高葉裊毶 여울물은 댓결같이 급히 흐름 기운 삼고 / 湍如竹節抽爲氣 돌은 연꽃 같이 빙 둘러 못 이루었네 / 石似蓮花拱作潭
○ 신녀회시(神女滙詩)는 다음과 같다. 오곡이라, 봄산은 깊고 또 깊은데 / 五曲春山深復深 냉랭한 패옥소리 빈 숲을 울리네 / 冷冷環佩響空林 이로부터 정수의 소원 이루리니 / 自從立得貞修願 인간의 온전치 못한 마음 백번이나 씻어주리 / 百洗人間未了心
이는 본래 기정(妓亭)인데 김공(金公)이 정녀협(貞女峽)이라 고쳤다.
○ 벽의만시(碧漪灣詩)는 다음과 같다. 육곡이라, 잔잔한 물결 굽이굽이 푸르른데 / 六曲平漪翠一灣 혼연한 그 강빛 가시 삽짝을 비치네 / 渾如江色映柴關 나는 여울 급한 폭포 그 무엇 때문인가 / 飛湍急瀑誠何事 징홍의 자재함에 미치지 못해서라네 / 不及澄泓自在閒
○ 백운담시(白雲潭詩)는 다음과 같다. 칠곡이라, 맑은 물 쏟아져 여울 되니 / 七曲琳琅瀉作灘 구름 피듯 눈 끓듯 사람의 눈을 끄네 / 崩雲沸雪要人看 신선 속인 관계없이 / 仙凡雅俗何須問 이곳에선 찬 기운 뼈에 사무치네 / 只是當時徹骨寒
○ 명옥뢰시(鳴玉瀨詩)는 다음과 같다. 팔곡이라, 반석이 비스듬히 깔렸는데 / 八曲盤陀側面開 옥을 굴리듯 맑은 물소리 변함없네 / 琮琤玉溜故潔洄 자연의 묘한 음악 지금 이와 같으니 / 勻天妙樂今如此 험한 길을 거쳐온 것 한스럽지 않네 / 不恨從前度險來
○ 와룡담시(臥龍潭詩)는 다음과 같다. 구곡이라, 신령한 소 물이 맑은데 / 九曲靈湫水湛然 상마 우거진 옛 마을 맑은 시내 끼었네 / 桑麻墟里帶晴川 늙은 용 인간에게 비 내릴 것 안 살피고 / 老龍不省人間雨 곡식 기를 시절에 깊은 잠만 자고 있네 / 春睡猶濃養麥天
[주D-001]화두시(和杜詩) : 두시(杜詩)를 차운한 것. 두보(杜甫)가 촉(蜀) 땅으로 들어갈 때 고시(古詩) 12수를 지었는데, 저자는 우리나라 춘천(春川)의 산수가 바로 성도(成都)와 같다고 여겨 두보의 〈입촉(入蜀)〉 고시(古詩)의 운을 차운하였다. [주D-002]장지화가 …… 취미 : 장지화는 당(唐) 나라 금화(金華) 사람으로, 만년에 강호(江湖)에 살면서 자칭 연파조도(煙波釣徒)라고 하면서, 배[舟]를 타고 초ㆍ삽 사이를 왕래하며 자유롭게 지냈다.《唐書 卷196》 [주D-003]예원진이 …… 정취 : 예원진(원진은 예찬〈倪瓚〉의 자)은 원(元) 나라 무석(無錫) 사람으로 시(詩)에 능하고 산수화를 잘 그렸다. 만년에 청한각(淸閑閣)과 운림당(雲林堂)을 짓고 편주(扁舟)로 호ㆍ묘를 왕래하면서 한가롭게 지냈다.《明史 卷298》 [주D-004]마늘봉은 …… 좋다지만 :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말에 민보(民堡)의 땅은 마늘봉[蒜峯]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하였다. [주D-005]유가만(柳家灣) : 고흥 유씨(高興柳氏)들이 세거(世居)함으로써 이루어진 소지명. [주D-006]북소궁(北蘇宮) : 고려 공민왕이 축조한 것으로, 신계현(新溪縣) 동쪽 70리에 있다. [주D-007]온조왕 …… 떠오르네 : 온조왕(溫祚王)이 18년 겨울 11월에 낙랑(樂浪)의 우두 산성(牛頭山城)을 치기 위해 구곡(臼谷)을 지나다가 대설(大雪)을 만나 회군(回軍)하였다.《三國史記》 [주D-008]왕조(王調)ㆍ최리(崔理) : 이들은 모두 한 광무(漢光武) 때 낙랑(樂浪)의 토추(土酋)였는데, 왕조는 태수(太守) 왕준(王遵)에게 피살되고, 최리는 구려(句麗)의 침략을 당하여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다.《三國史記》 [주D-009]태수(太守) : 한(漢) 나라에서 파견된 왕준(王遵)을 가리킨다. [주D-010]간교한 …… 염착(廉鑡) : 염사착(廉斯鑡)이라 하기도 한다. 왕망(王莽) 당시 염사착이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어 낙랑의 토지와 미인을 탐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침입하였다가 투항하였다. 당시 춘천은 한리(韓吏)가 와서 점거하였기 때문에 투항한 것이다.《魏略》 [주D-011]분원(分院) : 사옹원(司饔院)의 제작소. 관영(官營) 자기제조(磁器製造)를 맡아보던 곳으로 경기도 광주(廣州)에 설치하였다. 뒤에 분주원(分廚院)으로 개칭하였다. [주D-012]공(龔)ㆍ황(黃) : 공수(龔遂)와 황패(黃霸)를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한(漢) 나라 때 순리(順吏)로서 치민리(治民吏)의 대표적 인물이다. [주D-013]성도(成都) :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분지(盆地). 삼국(三國) 때 촉한(蜀漢)의 도읍지이다. [주D-014]납징례(納徵禮) : 혼례 육례(婚禮六禮) 중 한 가지. 성혼(成婚)의 증표로 예물을 드리는 예. [주D-015]이자현(李資玄) : 고려조의 문신ㆍ학자. 자는 진정(眞精). 호는 식암(息菴) 또는 청평 거사(淸平居士). 문과에 급제하고 대악서승(大樂署丞)에 있다가 사직하고 춘천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문수원(文殊院)을 짓고 선학(禪學)을 연구했다. 시호는 진락(眞樂)이며 저서는 《선기어록(禪機語錄)》 남유시(南游詩) 등이 있다. [주D-016]초도(椒塗)가 …… 알았고 : 초도(椒塗)는 곧 후비(后妃)를 가리키는 말이며, 얼음산은 믿을 수 없는 일을 비유한 것이다. 당시 이의(李顗)의 자매 3인은 문종(文宗)의 비(妃), 이호(李顥)의 딸은 선종(宣宗)의 비, 이자겸(李資謙)의 딸은 예종(睿宗)의 비가 되었는데, 이자현은 곧 이의의 아들이다. 이자현은 곧 이와 같은 척당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 입산수도(入山修道)한 것이다.《高麗史》 [주D-017]소장(蕭牆) …… 보았네 : 소장은 담장, 즉 집안을 이르는 말로서 당시 이자겸(李資謙)이 수금되고 그 지당(支黨)을 체포하자 임금은 화가 소장 안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다.《高麗史》 [주D-018]칠귀수(七貴綏) : 칠족은 외척을 포함한 귀족으로 한(漢) 나라에서 여(呂)ㆍ곽(霍)ㆍ상관(上官)ㆍ왕(王)ㆍ조(趙)ㆍ정(丁)ㆍ부(傅)를 쳤다. 수는 인수, 즉 고위의 벼슬자리를 가리킨다. [주D-019]오후청(五侯鯖) : 오후는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 곧 오후가 먹는 진귀한 음식을 말한다. [주D-020]궁중에선 …… 들었건만 : 당시 이자겸(李資謙)이 독병(毒餠)을 임금에게 먹여 시해하려 하였는데, 임금이 그 떡을 까마귀에게 시험하여 그 까마귀가 죽었던 사실이 있다.《高麗史》 [주D-021]등각(滕閣) : 중국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등왕각(滕王閣)을 말한다. 등왕(滕王) 이원영(李元嬰)이 세우고 왕발(王勃)이 서(序)를 썼다. [주D-022]기주(夔州) : 중국 강서성(江西省)에 있는 운양(雲陽)ㆍ무산(巫山) 등의 지역으로 경관이 절승한 곳이다. [주D-023]우두(牛頭) : 춘천 서북쪽에 위치한 산 이름. [주D-024]소사(小謝) : 송(宋) 나라 사영운(謝靈運)의 족제(族弟) 사혜련(謝惠連)을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당대 문장가였는데, 시(詩)에는 사혜련이 보다 능하였다고 한다. [주D-025]조부 …… 하셨네 : 조부는 김상헌(金尙憲)을 가리킨다. 청음(淸陰) 김상헌의 〈소양정(昭陽亭)〉 시에, ‘누전에 보이는 풍경 가장 노닐만 하네.[樓前形勝最堪游]’라고 하였다. 청음은 삼연(三淵)에게 증조부가 된다. [주D-026]금대의 …… 없고 : 험한 산세는 옷깃[襟]처럼 감싸고 강물은 띠[帶]처럼 둘린 요충지로서 한수(漢水) 남쪽에는 그런 지역이 없다는 뜻이다. [주D-027]패서 : 평안도(平安道)를 가리킨다. 산수가 수려하기로 팔도에서 손꼽힌다. [주D-028]십주(十洲) : 선인(仙人)이 산다고 하는 10개의 주. 곧 조주(祖洲)ㆍ영주(瀛洲)ㆍ현주(玄洲)ㆍ염주(炎洲)ㆍ장주(長洲)ㆍ원주(元洲)ㆍ유주(流洲)ㆍ생주(生洲)ㆍ봉린주(鳳麟洲)ㆍ취굴주(聚窟洲)를 말한다. [주D-029]사롱과 수불 : 좋은 시로 대우받음을 말한다.《청상잡기(靑箱雜記)》에, “위야(魏野)가 구래공(寇萊公)과 함께 산사(山寺)에서 노닐며 시를 지었다. 후일 다시 함께 그곳에 가니 관직이 높은 구래공의 시는 벽사(碧紗)로 감싸 놓았는데 위야의 시는 그대로 두어 먼지가 가득하였다. 동행한 기녀가 소매로 먼지를 털어내자 위야는 ‘때때로 붉은 소매 털어 줌이 있다면,[但得時將紅袖拂] 벽사로 감싼 것 그보다도 낫겠네.[也應勝似碧紗籠]’라는 시를 지었다.” 하였다. [주D-030]온조가 회군 : 앞의 주 204) 참조. [주D-031]팽오(彭吳) : 팽오는 복성(複姓). 팽오가(彭吳賈)가 협중을 공격하여 조선(朝鮮)을 멸하고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였다고 한다.《史記 平準書》 [주D-032]지금도 …… 일 : 청평산은 고려조의 문신 이자현(李資玄)이 은거한 곳으로서 그때의 일을 아직도 말함을 이름. [주D-033]소산기 : 중국의 소산현(蕭山縣) 아전들이 농간질을 잘하므로 부정한 짓을 하는 아전들을 가리켜 소산기가 있다고 하였다. [주D-034]도홍경(陶弘景)을 …… 알겠네 : 양(梁) 나라의 도홍경이 무제(武帝)의 부름을 받자, 소 두 마리를 그리되 한 마리는 풍성한 풀밭에 방목하는 형태로 그리고, 한 마리는 재갈을 물리고 머리를 얽어 사람에게 끌려가는 형태로 그려 무제에게 바쳐 출산(出山)하지 않을 뜻을 보였다. 화우령(畫牛嶺)이기에 인용한 고사.《梁書 卷51》 [주D-035]하목해구(河目海口) : 눈은 하수처럼 길고 입은 바다처럼 깊은 것으로, 공자(孔子)의 눈과 입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주D-036]목계(木溪) : 남한강 상류 충주읍(忠州邑) 서쪽 30리 지점에 위치한 나루터의 지명. [주D-037]구당협(瞿唐峽) : 협곡의 이름.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절협(絶峽)으로서 두 언덕이 모두 현절하게 높아 이곳을 강관(江關)으로 삼았는데, 이곳 망단기(望斷碕)를 여기에 비유한 것이다. [주D-038]봉산(蓬山)과 약수(弱水) : 모두 중국에 있는 산수로 구당협(瞿唐峽)과 연관되어 있다. 이곳 망단기의 주위 산수를 여기에 비유한 것이다.
[출처] 잡평(雜評) 산행일기(汕行日記)|작성자 새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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