臺頭寺雨中送李邦直赴史館, 分韻得憶字人字, 兼寄孫巨源二首
사관으로 부임하는 이방직을 빗속에 전송하며 ‘억’자와 ‘인’자를 운으로 나눠 받아 지은 2수,
손거원에게도 보내다
蘇軾
소식
其一
霜林日夜西風急 상림일야서풍급
老送君歸百憂集 노송군귀백우집
淸歌窈眇入行雲 청가요묘입행운
雲爲不行天爲泣 운위불행천위읍
紅葉黃花秋正亂 홍엽황화추정란
白魚紫蟹君須憶 백어자해군수억
憑君說向髥將軍 빙군설향염장군
衰病相逢應不識 쇠병상봉응불식
서리 내린 가을 숲에 하루 종일 거센 바람
늘그막에 떠나는 벗 밀려드는 온갖 걱정
청아한 노랫소리 허공 속으로 흩어지니
구름은 가다 멎고 하늘도 눈물을 흘리누나
붉은 잎 노랑 꽃 가을 한창 깊어갈 때
피라미와 자게 안주 부디부디 잊지 말고
내 대신 미염공 신로에게도 말해주오
늙고 병들어 만난다면 알아보기도 힘들 테니
其二
珥筆西歸近紫宸 이필서귀근자신
太平典冊不緣麟 태평전책불연린
付君此事寧論晉 부군차사영논진
載我當時舊⟪過秦⟫ 재아당시구과진
門外想無千斛米 문외상무천곡미
墓中知有百年人 묘중지유백년인
看君兩眼明如鏡 간군양안명여경
休把⟪春秋⟫坐素臣 휴파춘추좌소신
도성에 가면 붓을 꽂고 천자를 가까이 모시면서
태평한 시절 중요한 것들을 기록하게 될 것인데
그대에게 맡겨진 일 ⟪진서⟫의 과실을 논하지 말고
진나라 멸망에 대해 썼던 내 글이나 올려주오
문 밖에 있는 천 곡의 쌀 생각 못할지라도
무덤 속 백 년 산 사람 있는 것은 알 것이고
내 보기에 그대의 눈 거울처럼 맑고 밝으니
춘추필법 그만두고 물러나 조용히 지내기를
▶ 史館: 사서史書를 편찬하는 관리를 가리킨다. ⟪송사宋史⋅신종기神宗紀⟫에서 ‘元豊四年詔曾巩充史館修撰, 專典史事(원풍 4년에 증공을 불러 사서 편찬을 위한 인재를 충원하여 그에 관한 일을 전담하게 하였다).’라고 했다.
▶ 分韻: 여러 사람이 시를 짓기 위해 운을 나눠 받는 것을 말한다. 백거이白居易는 「花樓望雪命宴賦詩」란 시에서 ‘素壁聯題分韻句, 紅爐巡飮暖寒杯(운을 받아 흰 벽 위에 한 구절씩 적어놓고 / 데운 술잔 돌려가며 얼어붙은 몸 녹이네)’라고 하였다.
▶ 窈眇: 오묘하다. 아름답다. ‘窈渺’ 및 ‘窈妙’와 모두 통한다.
▶ 白魚紫蟹: 피라미와 자게로 새겨 읽었다.
▶ 髥將軍: 손거원孫巨源을 가리킨다. 소식이 「次韻秦關秀才見贈」이란 시에서도 ‘一聞君語識君心, 短李髥孫眼中見(자네 말 한마디에 자네 마음 알겠고 / 키 작은 공택과 미염공 거원도 눈에 선하네)’이라고 했다.
▶ 珥筆: 붓을 머리에 쓴 관冠 옆에 꽂는 것을 가리키는데, 옛날에 사관史官들이 조정에 들어갈 때 이런 방식으로 즉각적인 사건의 기록에 대비하였다.
▶ 紫宸: 천자가 지내는 궁전을 가리킨다. 당송기唐宋期에는 신하들을 접견하거나 외국 사절들의 경하를 받던 대명궁大明宮 안에 있던 정전正殿이었다. 두보杜甫는 「冬至」란 시에서 ‘杖藜雪後臨丹壑, 鳴玉朝來散紫宸(눈 내린 뒤 지팡이 짚고 붉은 골짜기 앞에 서니 / 조회를 마치고 패옥을 울리며 자신전 나설 때 생각나네)’이라고 했다.
▶ 典冊: 각종 법령과 제도, 문물 등에 관한 제왕의 조서를 기재한 중요 문서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사서史書를 가리키는 것으로 새겨 읽었다.
▶ 不緣麟: ‘’중요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새겨 읽었다. 여기서 ‘不’은 ‘크다’는 뜻의 ‘丕’와 통한다.
▶ 素臣: 춘추필법春秋筆法에 기초하여 유가儒家의 경전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경학가經學家를 가리킨다.
동파가 서주지주徐州知州로 있을 때인 희녕熙寧 10년(1077)부터 원풍元豊 원년(1078) 사이에 쓴 것이다.
대두사는 서주徐州의 가장 오래된 유적 희마대戱馬臺 동쪽에 있는 고찰로
고향 팽성彭城을 잊지 않으려는 송무제宋武帝 유유劉裕의 바람으로 창건되었다.
타두사陀頭寺란 이름으로도 불린다.
이방직(1032~1102)은 이름이 청신淸臣이고 위현魏縣(하북河北 대명大名) 사람이다.
일곱 살 때 전적을 읽고 하루에 수천 자를 암송하였다.
한기韓琦가 소문을 듣고 조카사위로 삼았고, 과거에 급제하여 형주사호참군邢州司戶參軍이 되었다.
구양수는 방직이 재식겸무과材識兼茂科에 응시했을 때는 그의 문장을 소식蘇軾에 견줘 칭찬하고,
치평治平 2년(1065)에 비각책秘閣策에 응시하여 급제했을 때는
‘이청신이 장원이 되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문장을 높이 평가하였다.
신종神宗 때 양조사편수관兩朝史編修官을 지냈고, 휘종徽宗 때는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냈다.
시문으로 신종의 신임을 얻은 청신은 간결하고 중후하며 자유분방한 문장으로 일가를 이뤘고,
사람들은 부귀해진 뒤에도 검약하는 평소 모습 그대로일 뿐만 아니라
관리로서 법을 중시하고 사사로움을 취하지 않는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제1수의 제7구 중 ‘憑君說向髥將軍’을 여기서는 손각孫覺(자 신로莘老)으로 새겨 읽었다.
동파를 비롯한 신로와 공택公擇(이상李常) 모두 미염공美髥公 소리를 들을 만큼
숱이 풍성한 수염을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동파의 시 중에 신로의 수염에 대해 말한 것이 있어서 여기서도 신로로 새겨 읽었다.
자네 말 한 번 듣고 자네 마음 알겠고(一聞君語識君心)
키 작은 공택과 미염공 신로도 눈에 선하네(短李髥孫眼中見)
- 소식蘇軾의 시 「次韻秦觀秀才見贈」 중에서
제2수 제3,4구 ‘付君此事寧論晉, 載我當時舊⟪過秦⟫’는
권력을 둘러싼 붕당간의 경쟁이 극심한 황궁에서
약사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다루는 글을 쓰다가 필화사건을 겪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사관이 되어 조정으로 들어가는 사람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을 읊은 것인데,
⟪過秦⟫은 진나라의 멸망에 관해 쓴 자신의 ⟪육국론六國論⟫을 말한 것으로 새겨 읽었다.
六國之君虐用其民, 不減始皇二世, 然當是時百姓無一叛者; 以凡民之秀杰者, 多以客養之, 不失職也.
육국지군학용기민, 불감시황이세, 연당시시백성무일반자; 이범민지수걸자, 다이객양지, 불실직야.
여섯 나라 국왕들의 학정도 시황2세에 모자라지 않았으나
당시에 반역을 도모하는 백성들이 하나도 없었다.
백성 중에 빼어난 사람들 대다수가 객경으로 부양을 받으며 각자의 직분을 갖고 있어서였다.
其力耕以奉上, 皆椎魯無能爲者, 雖欲怨叛, 而莫爲之先, 此其所以少安不卽亡也.
기력경이봉상, 개추로무능위자, 수욕원반, 이막위지선, 차기소이소안부즉망야.
땅을 갈아 윗사람을 봉양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우둔하고 별다른 능력을 갖지 못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싶어도 그들을 이끌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여섯 나라 모두 점차 안정되어 곧바로 멸망하지 않았다.
始皇初欲逐客, 用李斯之言而止; 旣并天下, 則以客爲無用.
시황초욕축객, 용이사지언이지; 기병천하, 즉이객위무용.
(그러나) 진시황은 객경들을 쫓아내려 했다가 이사의 말을 듣고 그만두기는 했지만
천하를 병탄한 뒤에는 객경들은 쓸모가 없는 것으로 여겼다.
(…)秦之亂雖成於二世, 然使始皇知畏此四人者, 使不失職, 秦之亡不至若是其速也.
(…)진지난수성어이세, 연사시황지외차사인자, 사불실직, 진지망부지약시기속야.
(…) 진나라의 동란이 이세 시대에 형성되기는 했지만
진시황이 (智⋅勇⋅辯⋅力이 뛰어난) 네 부류의 사람들을 무서워할 줄 알고
그들이 직분을 잃지 않게 했다면 진나라가 그렇게 빨리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縱百萬虎狼於山林而飢渴之, 不知其將噬人, 世以始皇爲智, 吾不信也.
종백만호랑어산림이기갈지, 부지기장서인, 세이시황위지, 오불신야.
백만의 호랑이와 승냥이가 산 속에서 배가 고파 사람을 잡아먹을 줄 몰랐으니
세상사람들이 진시황을 지혜롭다고 하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 소식蘇軾의 ⟪육국론六國論⟫ 중에서
아래는 마지막 구절 중 ‘素臣’과 관련된 내용이다.
周左丘明受經於孔子. 因春秋作傳. 杜預云: 仲尼爲素王, 丘明爲素臣.
주좌구명수경어공자. 인춘추작전. 두예운: 중니위소왕, 구명위소신.
주나라 때 좌구명이 공부자에게 경서를 받아 ⟪춘추⟫의 ⟪전(좌전)⟫을 썼다.
(진晉나라 때) 두예가 말했다.
“공중니는 소왕(왕위에 오르지 않은 왕)이고, 좌구명은 소신(출사하지 않은 신하)이다.”
孔子嘗曰: 巧言令色足恭, 左丘明耻之, 丘亦耻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耻之, 丘亦耻之.
공자상왈: 교언영색주공, 좌구명치지, 구역치지. 익원이우기인, 좌구명치지, 구역치지.
공부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럴듯하게 꾸민 달콤한 말과 부드럽게 꾸민 번지르르한 얼굴과
아첨의 소지가 있는 지나친 겸손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거니와 나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또) 원한을 감추고 그 사람을 친구로 삼는 것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거니와 나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足: 지나칠 주)
宋元豊中, 詔左丘明從祀, 封瑕丘伯.
송원풍중, 조좌구명종사, 봉하구백.
송나라 원풍 연간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좌구명을 공부자와 함께 대성전에 배향하고
(좌구명의 고향인 하구의) 하구백으로 봉했다.
- 작자미상의 「문창제군음즐문文昌帝君陰騭文」 중에서
실제로는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원년(1008)에 하구백으로,
휘종徽宗 정화政和 원년(1111)에 중도백中都伯으로 봉해졌다.
◈ 소식蘇軾 [1037~1101]
북송北宋의 문학가이자 서법가로 자는 자첨子瞻(과 화중和仲)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다. 미주眉州 미산眉山(지금의 쓰촨성四川省 미산眉山) 사람이다. 인종仁宗 가우嘉祐 2년(1057)에 아우 소철蘇轍과 함께 진사가 된 뒤 벼슬을 살다가 중앙에서 쫓겨나 오랫동안 변방에서 고초를 겪었다. 시詩⋅사詞⋅문文⋅서書⋅화畵에 두루 능하여 중국에서도 역사상 드물게 다방면에 걸쳐 예술적 성취를 이룬 인물이다. 구양수歐陽脩의 뒤를 이어 북송의 문단을 이끌었고, 부친 소순蘇洵 및 아우 소철과 함께 세 부자父子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자리를 차지하며 가문의 문풍을 날렸다. 사에서는 신기질辛棄疾과 함께 소신蘇辛으로, 시에서는 황정견黃庭堅과 함께 소황蘇黃으로 병칭되었으며, 서법에서도 황정견, 미불米芾, 채양蔡襄 등과 함께 송사가宋四家로 불렸다. 작품집으로 《동파칠집東坡七集》과 《동파악부東坡樂府》 등을 남겼고, 《동파전집東坡全集》 150권이 전한다.
◈ 이청신李淸臣 [1032~1102]
북송北宋의 대신으로 자는 방직邦直이고 하북河北 대명大名 사람이다. 일곱 살 때부터 독서를 시작한 뒤 하루에 수천 자를 읽었다. 어느 날, 그의 형이 도성에서 온 객과 절에 화재가 발생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이것은 재난으로 백성들이 입는 피해가 작지 않은데 하늘이 경고를 한 것인가요?” 그 말을 들은 형이 어린 아우를 가문을 일으킬 재목이라 생각하며 놀랐다. 사인詞人 한기韓琦가 청신의 문재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사위로 맞았다. 진사가 된 뒤에 형주사호참군邢州司戶參軍을 지냈고, 재식겸무과材識兼茂科에 응시했을 때 구양수歐陽修가 그의 글을 소식蘇軾에 견줄만하다 하였다. 휘종徽宗 즉위 후 문하시랑門下侍郞이 되었지만 증포曾布의 모함으로 지대명부知大名府로 나갔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
◈ 손각孫覺 [1028~1090]
북송 때 사인詞人으로 자는 신로莘老이고 장쑤江蘇 고우高郵 사람이다. 젊어서 호원胡瑗과 진양陳襄을 사사했고, 인종仁宗 황우皇祐 원년(1049)에 진사가 되었다.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소송蘇頌, 증공曾巩 등과 교유하였고, 황정견黃庭堅의 장인이자 진관秦觀과 육전陸佃, 왕령王令의 스승이다. 가우嘉祐 연중에 소문관昭文館의 서적을 교정했고, 관각교감館閣校勘이 되었다. 신종神宗 즉위 후 우정언右正言과 지간원知諫院, 동수기거주同修起居注, 지심관원知審官院을 역임했다. 희녕熙寧 연중에 청묘법靑苗法에 반대하다가 광덕지군廣德知軍으로 좌천되어 호주湖州와 여주廬州 등 일곱 주의 지주知州를 전전하다가 조정으로 복귀하여 태상소경太常少卿이 되고, 비서소감秘書少監이 되었다. 철종哲宗 즉위 후 어사중승御史中丞과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로 지내다가 병으로 서주舒州 영선관靈仙觀을 관리했다. 진관秦觀은 그에 대해 ‘轉守七州多異政, 封常處處有房祠(일곱 개 주를 돌아다니며 각기 다르게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쳐 그가 다녀간 곳마다 사람들이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라고 했다. ⟪주역⟫을 좋아했고, ⟪춘추⟫에 정밀했다. 곡량적穀梁赤의 설을 위주로 하면서 좌구명左丘明과 공양고公羊高 및 한당漢唐 제가諸家의 설을 참고하여 ⟪춘추경해春秋經解⟫를 저술했고, ⟪역전易傳⟫과 ⟪주의奏議⟫ 등의 저서가 있다.
◈ 이상李常 [1027~1090]
북송北宋 때 시인이자 장서가로 자는 공택公擇이고 건창建昌 사람이다. 황정견黃庭堅의 외숙이다. 어렸을 때 여산 廬山의 백석승사 白石僧舍에서 수학했는데, 과거에 급제했을 때까지 베껴 쓴 전적이 구천 권에 이르러 이씨산방李氏山房이라 하였다. 황우皇祐 연간(1049~1054)에 진사가 되고 희녕熙寧(1068~1077) 초기에 비각교리가 되었는데, 왕안석의 눈에 들어 삼사조례검상관三司條例檢詳官과 우정언右正言、지간원知諫院이 되었다. 어사중승을 지낸 뒤 등주지주로 나갔다. 성도成都에서 행차 중 급사했다. 저작으로 ⟪주의奏議⟫(60권), ⟪시전詩傳⟫(10권), ⟪원화회계록元和會計錄⟫(30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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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식 - 대두사우중송이방직부사관, 분운득억자인자, 겸기손거원|작성자 들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