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懶翁大師

배상혁 2021. 5. 7. 22:24

나옹대사(懶翁大師) 1320년∼1376년

 

 

 

고려말의 역사의 격동기를 살다간 승려. 나옹에 대한 기록은 碑文, 사리탑명(舍利塔銘),

어록(語錄), 가송(歌頌)등이 있으나 그의 門人 석굉(釋宏)이 남긴

[나옹화상행장(懶翁和尙行狀)]이 가장 자세함. 諱가 혜근(慧勤). 처음 이름은 원혜(元蕙).

속성은 牙氏인데 영해부(寧海府) 사람. 종7품 선관서령(膳官署嶺)이었던 아버지

아서구(牙瑞具)와 영산군인(靈山郡人) 어머니 奠氏 사이에서 1320년(충숙왕 7)에 태어남.

 

1340년(충혜왕 1) 20세 때 공덕산(功德山) 묘적암(妙寂菴) 요연선사(了然禪師) 밑에서 출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4년간 정진한 후 깨달음을 얻음.

1347년 (충목왕 3) 28세 때 元에 가서 인도승(印度僧) 지공(指空)을 찾아가

지공문하(指空門下)에서 2년간 수학해 불교사상의 기틀 마련.

여러 임제선종(臨濟禪宗)의 禪師들을 찾아다니면서 선기(禪氣)를 닦음.

 

1358년(공민왕 7) 요양(遼陽)을 거쳐 귀국. 平壤, 東海, 오대산 상두암(五臺山 象頭庵)에서 설법.

1361년(공민왕 10)에는 해주 신광사 (海州 神光寺)에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부터

신광사(神光寺)를 지켜냄. 이 후 왕명으로 청평사(淸平寺)주지.

1367년 스승인 지공에 대한 기념사업에 전념. 1370년(공민왕 19) 모든 종파를 망라하는

공부선(功夫選) 주관. 1371양(공민왕 20) 王帥로 책봉 받고 송광사(松廣寺)에 주지.

1372년 지공의 사리탑을 세우고 회암사(檜巖寺)를 크게 중수.

1376년 낙성회를 베풀게 됨. 나옹은 농번기 때 낙성회에 참여하려는

백성들의 이동을 두려워한 관원들의 우려로 밀양 영원사(瑩原寺)로 가는 초입에

1376년에 (우왕 2) 5월 15일 신륵사(神勒寺)에서 갑자기 질병으로 입적.

 

다비하자 수많은 사리가 처음엔 150粒이었고 이것이 갈라져 558粒이 됨.

나옹의 利石鐘은 많은 곳에 세워졌는데 1384년까지 李穡이 적종비문을 써준 곳만해도

금강산(金剛山), 치악산(稚岳山), 소백산(小白山), 사불산(四佛山), 용문산(龍門山),

묘향산(妙香山), 신륵사(神勒寺) 등 8개곳. 門徒에는 고려말 國師였던 환암혼수(幻菴混修)와

조선 초에 왕사였던 무학자초(無學自超)가 있음. 나옹의 사상적 기반은

국내에서 닦은 사굴산 계통의 조계종(曹溪宗), 元에서 감화를 받은 指空의  영향,

평산처림(平山處林)으로 대표되는 임제종(臨濟宗)의 3갈래라 할 수 있음.

 

수행방법에 있어서도 염불(念佛)을 중요시하고 미타일념(彌陀一念)으로

청정심(淸淨心)을 계속하면 삼악도(三惡道)를 벗어나는 정각(正覺)의 지름길로 보아

서방정토를 별개로 인정하지 않고 禪家의 입장에서 정토 자체를 마음에서 구하고 있음.

 

나옹은 고려 왕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순수한 종교인의 모습으로 修道와

고승들과의 대화를 통한구도에 힘썼던 승려. 원주 영전사지(令傳寺址)에도

보제존자(普濟尊者) 사리탑 2기에서는 모두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는데

납석제(蠟石製) 지석(誌石)이 나왔음. 그 명문에 의하면 나옹 사후 12년만인 1388년(우왕 14)에

각수(覺修)와 비구니 묘관(妙寬)이 나옹의 사리 2校를 각각 主塔과 東塔에 안치하였음을 보여 줌.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

 

'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녁의 산책  (0) 2021.08.26
北漢  (0) 2021.08.26
李叔蕃  (0) 2021.02.09
Philistine  (0) 2021.01.31
車一赫  (0) 2021.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