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수유리
바라보다 ・ 2020. 10. 5. 0:19
도성도 都城圖
국박 소장품번호 M번 101
도성도 都城圖, 한양 지도
세로 65.5cm, 가로 74.5cm
국박 소장품번호 M번 113
충무로 명보극장 앞에서 보이는 세 봉우리, 노적봉-백운대-인수봉. 이 길 끝이 돈화문이다.
김원_ 겨울 인수봉 (1976)
1.
몇 일 전에 웹에서 수유리,란 이름이 붙은 글을 봤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2286206?sid=103
'왜 자꾸 수유리로 불러요?'... 푸대접 속상했던 주민들
[어느 도시인의 고향 탐구] 수유리⑤ 토끼목장 열풍에서 노도강 시대로 오기까지 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살던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 <편집자말
n.news.naver.com
오랫동안 수유리에서 살아본 입장에선, '수유리'가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그게 왜 푸대접이야,라는 반문이 먼저 든다.
대중매체에서, 사회면 사건 기사가 아닌, '수유리'가 호명된 것은 극작가 김수현의 드라마에서 '수유리에서 전화가 왔다'는 대사가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의 드라마에선 가회동이나 성북동, 평창동 식으로 사회적 계급이나 부의 여부가 지명에 은근히 깔리곤했다. 기억으론, 평범한 보통의 계급 구성원(캐릭터)을 염두에 둔 호명이었다.
2.
어렸던 나의 세계에선 세일극장 네거리부터 한신대 입구, 화계사 어름까지만 수유리였다.
나중에 주소나 행정구역을 알때 쯤에서야 신일고가 있는 미아역 부근부터 4.19탑이 있는 곳까지, 빨래골로 불리는 삼양동 직전 부위까지 다 수유리라는 것을 알았다.
범골 능선의 범바위쯤에서 저멀리 산밑을 보면 화계사 골짜기 부터 세일극장까지, 거기서 중랑천이 닿는 곳까지 일직선의 6차선쯤 되는 일직선 도로가 보였다.
강북에, 60년대에 서울에 편입된 변두리에 도시계획이 있을리가 만무하다. 삐뚤 빼뚤하고 비대칭적인 도로, 넓어야 2차선 도로가 자연스럽다.
이 널찍한 도로는 개천의 선물. 도시에 편입되기 직전 도시난민이 선점되면서 불규칙한 구획정리가 되는데 개천 위에 집을 지울 수는 없는 법.
그래서 개천을 메워 '어울리지 않는' 대로가 생긴 것이다.
3.
이 도로는 수유리水踰里란 지명의 증거물이기도 하다.
아침 또는 새벽에 귀가할 때 아침해를 받아 번쩍이는 북한산을 보면 질릴 때가 있었다. 대도시 중 집 뒤에 이렇게 가파른 산이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파르다.
빨래골이란 곳은 말그대로 물이 늘 풍부한 개천이 있어서 늘 빨래를 할 수 있는 곳이란 지명이다. 청계천이 장마철을 빼고 오물 냄새로 골칫거리였던 것은 장마철을 빼곤 늘 수량이 부족한 건천이었고 한양-서울이 하수도 시설이 없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빨래골이나 화계사 계곡이나 아카데미하우스쪽 계곡이나 모두 산비탈을 맹렬히 굴러 내려가 우이천-중량천-한강으로 합류한다.
범바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동쪽으로 곧게뻗은 대로는 북한산 동사면에 장마철에 내리는 엄청난 빗물은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 해일처럼 무너미를 덮쳤을 것이다. 폭주하던 물의 흐릉이나 양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흔적이 복개된 도로의 널찍한 폭이 보여주는 셈이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무너미水踰 고개,에서 따온 것이다. 큰 비가 오면 물이 고개를 넘을 정도로 엄청나게 맹렬한 곳.
그런데 아직도 심증이 안가는 것은 대체 어디가 수유리 고개인가 하는 점이다.
통상 수유리로 부르는 4호선 수유역-미아역 부근은 고개라고 이름붙일 지형이 아니다. 4.19탑-한신대-빨래골 라인의 지금 경전철 우이선이 다니는 곳이 고개가 중첩된 산지인데 여기가 조선시대 양주로 향하던 메인 통로인지는 확인해보지 못했다.
다만 옛 지도를 보면 돈화문-성균관-성문 너머 인수봉까지 일직선으로 표시된 것을 보면 지금 메인 통로인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근대의 산물일 수도 있다.
4.
기억 속의 수유리 상징물은 화계사, 세일극장, 제일은행, 제세의원, 한신대다.
네거리 근처에 살 때 기억으로 추정되는 아주 희미한 기억 중에 하나는 군데 군데 땅이 비어있고 옥수수가 땅 경계선에 심어져있고 그 사이로 키작은 내가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 거리던 장면이다. 앞 뒤 장면도 다 사라졌다.
한신대는, 윗동네로 이사갔을 때 밤새 담너머로 모닥불 불빛이 어른거리고 북치고 소리지르던 기억이 난다. 어른께 물어보면 데모한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무렵 동네 목욕탕을 갔는데 머리를 빡빡 민 아저씨들과 더 늙은, 머리가 허연 아저씨가 함께 몰려와 목욕하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추정해 보건데 '삭발투쟁'하고 교수님과 함께 몰려왔던 것이다.
나중에 학부 과정은 경기도로 이사가면서 동네가 조용해졌다.
한신대 경내의 보호수.
5.
나중에 보니 화가도 수유리에 많이 살았다.
전국광이나 박생광 등 등.
해방 전후 성북동으로 밀려났던 화가들이, 60년대엔 새로 편입된 서울인 수유리로 모여들었다. 땅값의 자연스러운 논리.
80년대에 이들은 지대가 더 싼 파주나 용인, 양수리로 더 퍼져나갔다.
각설.
수유리,라고 부르면 빈정이 상하는 세계관이 별로 반갑지 않다.
그때도 지금도 서민이 사는 동네, 서울 온도보다 평균 2도쯤 낮은 동네. 주택가가 빌라촌으로 변해서 매력은 반감됐지만, 내 눈에 여전히 그럴듯한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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