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나시립박물관@시에나, 미술관
시에나,라는 이름이 귀에 익은 게 뭣 때문일까 생각해 봤는데 딱히 이거다 싶은 것은 없네요.
배우 이름으로도 쓰이고, 이게 갈색 계통의 색상을 가리키는 말에도 쓰이는데, 그보다 더 전부터 시에나라는 이름이 익숙했네요. 풍전사의 차 이름 때문이었을까요.
어쨌든.
褐色의 이름, 시에나로- 시에나(raw sienna)색은 이탈리아 산지 명에서 유래하여 사용하게 된 색명이다. 시에나토는 산화철, 점토粘土, 모래 등이 혼합된 황토종의 흙으로 안료로 사용한다.
로-는 가공하지 않은 생 로-시에나를 말한다.
브라운 색의 대표격이라고 말하는 번트 시에나(burnt sienna)는 로 시에나를 가열하고 태워서 만든다.
시에나 특유의 색은 건물에서 나오고, 그 건물은 시에나의 흙으로 구운 벽돌로 지은 건축물 때문이지요.
그래서 붉은 색이 도는 벽돌 건물이 주는 색상의 변주를 기대하고 갔는데, 비가 올듯 먹구름이 잔뜩 낀 날씨여서인지 근사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어요.
흔히 남유럽부터 중부유럽의 프라하까지 사랑받는 지붕색깔, 붉은 기가 도는 기와 지붕과 베이지 또는 흰색 톤의 조합이 주는 경쾌함은 없네요. 대신 좀 가라앉은듯 차분하고 약간은 무거운 느낌이 들었네요.
여기가 오래되고 고집센 도시다,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특이하게도 다른 투스칸 지방의 도시, 그러니까 에르투리아인이 살던 도시가 대부분 가파른 컵케익 위에 올라가앉은 모양인데 시에나는 그나마 비교적 평지같은 느낌이 들었네요.
성문 근처쯤 되는 곳에 주차한 뒤 슬렁 슬렁 걸어도 금방 성안의 중심인 궁전과 대성당과 그 사이의 광장에 도착이 가능한 규모의 소도시.
시에나 시립박물관으로 쓰이는 푸블리코 궁전과 만지아 타워.
대성당 높이와 만지아 타워이 높이가 같다고 하네요.
푸블리코 궁전이 타운홀로 쓰였는데, 사제와 시민의 권력은 같다는 '훌륭한' 생각으로 인해 그리 정했다고 하네요.
푸블리코 궁전 앞 광장.
아주 약간의 경사가 적용된 깔때기 형의 광장.
비가 오면 당연히 궁전 앞 빗물 배수관으로 모이게 되는 구조.
시에나 브라운이 일으키는 멀미(?).
시에나에서 가장 감탄한 것은 골목길을 걸으면서 마주치는 여염집의 창틀과 현관 문을 장식한 각종 철물들.
다른 도시에서도 각기 특색있는 철물 가공 솜씨를 보여줬지만 제 기억으론 시에나가 가장 인상깊었네요.
물론 호텔이나 궁전, 메디치궁 같은데서는 당연히 최고의 솜씨만 돈들여서 모아놨으니 훌륭한 게 당연하겠지만 여염집까지 센스있게 처리한 것은 시엔나가 가장 돋보였어요.
코뚜레를 닮은 것인지, 만지아 타워를 형상화한 것인지, 창작자의 심오한 의도는 잘모르겠지만 충분히 제3의 모델을 떠오르게 만들만한 디자인.
푸블리코 궁전= 시에나 시립미술관+만지아 타워
입장료는 따로 내지만, 사실상 같은 건물이라는 얘기.
The Torre del Mangia is a tower in Siena, in the Tuscany region of Italy. Built in 1338-1348,[1] it is located in the Piazza del Campo, Siena's premier square, adjacent to the Palazzo Pubblico (Town Hall). When built it was one of the tallest secular towers in medieval Italy.[2] At 102 m, it is second tallest after Cremona's Torrazzo (112 m (367 ft)) the Asinelli tower in Bologna at 97 m being third.
The tower was built to be exactly the same height as the Siena Cathedral as a sign that the church and the state had equal amounts of power.[nb 1]
Literally meaning "Tower of the Eater", the name refers to its first bellringer, Giovanni di Balduccio, nicknamed Mangiaguadagni ("Eat-the-profits", that is "Profit eater") either for his spendthrift tendency,[4] idleness[5] or gluttony.

The Torre del Mangia is a tower in Siena , in the Tuscany region of Italy . Built in 1338-1348, [1] it is located in the Piazza del Campo , Siena's premier square , adjacent to the Palazzo Pubblico (Town Hall). When built it was one of the tallest secular towers in medieval Italy. [2] At 102 m, it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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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블리코 궁전 안의 중정 하늘.
굴뚝 모양 빼꼼하게 목을 내민 게 만지아 타워.
타워 구경은 시간도 그렇고, 성안 타워 풍경이 그러려니 여기고 패스.
역시나 같은 모티브의 마당 기둥 철물.
옷걸이로 썼을리는 없을 것 같은데....
이 늑대는 시에나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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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전승에 따르면, 시에나는 레무스의 아들이자 로물루스의 조카인 세니우스와 아스키우스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아마 그들의 아버지가 로물루스에게 살해당하고 로마에서 도망쳐 나올때 젖먹이는 암늑대 상(카피톨리나 늑대상)을 가져왔는데, 이 석상은 시에나의 상징물이 되었다. 추가로 두 형제는 하얀색 말과 검은색을 말을 타고 왔는데, 여기서 검은색 위에 하얀색이 들어가 있는 시에나의 문장이 되었다. 일부에서는 시에나의 명칭이 세니우스(Senius)에서 왔다고도 주장한다. 그외 어원학적 유래로는 에트루리아 가문 이름인 사이나(Saina), 로마 가문 이름인 사에니(Saenii) 또는 라틴어 단어로 늙음을 뜻하는 세넥스(senex)와 늙어있다를 뜻하는 세네오(seneo) 등이 있다.
시에나는 로마 시대에 번영하지 못 했다. 어떤 중요 도로와 밀접해 있지 않았고 교역을 할 기회도 많지가 않았기 때문이였다. 서기 4세기까지 기독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자세를 취했었고, 시에나와 그 주변 지역등이 번영하기 전까지 롬바르드족에게 침입을 받지 않기도 하였다. 롬바르드족에게 점령당한 후, 구 로마의 도로인 아우렐리아 가도와 카시아 가도가 비잔티움 제국의 이탈리아 원정으로 노출되자, 롬바르드족은 그들의 북부 점령지와 로마를 연결하는 안전 교역로를 시에나를 통해 가능 방법으로 재 연결시켰다. 시에나는 교역의 중심지이자 끊임없는 성지 순례자들로 번창하였고, 로마에서 발생한 수익이 들어왔다.
시에나의 오래된 귀족 가문 계층들은 774년에 샤를마뉴에게 항복한 롬바르드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프랑크족 감시자들이 기존의 시에나 귀족들과 결혼하면서 밀려들어왔고 이렇게 남겨진 그 유산은 시에나 영토 곳곳에 남아있는 수도원들에서 발견된다. 1115년 국경 지역 토스카나 후국의 토스카나의 마틸데 공작부인이 사망하고 여러 자치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이게 궁극적으로는 시에나 공화국의 건국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시에나 공화국은 11t세기 후반부터 1555년까지 수백년 간을 존재했었다. 1348년에 시에나를 강타한 흑사병이 오기 전인 황금기에는 도시 인구가 5만 명에 이르렀다.
이탈리아 전쟁에서, 공화국은 스페인 왕실과 동맹을 맺은 그들의 경쟁 상대인 피렌체 공국에게 패배하였다. 18달의 저항 끝에 1555년 4월 17일 스페인에게 항복하며, 공화국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메디치 가문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던 신왕인 스페인 펠리페 2세는 이곳(프레시디국에 합병되어 해얀요새들이 있던 영토)을 토스카나 대공국에 넘겨주었고, 19세기에 이탈리아가 통일될 때까지 토스카나 대공국에 속해있었다.
시에나 공화국 정부 인사 귀족 700여명은 1559년까지 몬탈치노에서 거주했었다.
_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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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를 끊은 이만 들어갈 수 있는 문.
비아지오 디 몬룩
Biagio di Monluc, o Blaise de Lasseran- Massencome (Saint-Puy, 1502 – Estillac, 26 giugno 1577),
he was a French leader and writer.
Lord of Monluc, descendant of a noble and numerous family, but now in decline, Biagio di Monluc, by necessity and by vocation, enlisted at a young age in the French army taking part in the "Italian Wars" fought by the French king Francesco I against the emperor Charles V.
Subsequently it played a relevant role in the heroic defense of the Republic of Siena besieged by the army of Charles V. Under the reign of Francis II and Charles IX he distinguished himself for the relentless ferocity in the religious war against the Huguenots. In the last period of his life he wrote the memoirs of his war actions in the Commentaries.
시에나 공화국의 沒落
시에나 공화국(이탈리아어: Repubblica di Siena)은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주에 있는 시에나에 있었던 나라이다.
11세기부터 1555년까지, 5세기 넘게 존재했었던 나라이다. 이탈리아 전쟁 기간에 시에나 공화국은 스페인 왕실과 동맹이였던 경쟁국인 피렌체 공화국에게 패배하였고, 18달 동안의 저항 끝에 1555년 4월 17일 항복하며 공화국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페트루치 시대의 끝과 함께,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지원을 받은 노베스키 당을 몰아내려는 대중 세력간의 내부갈등이 재개되었고, 클레멘스 7세는 시에나로 군대를 파견하지만, 1526년에 카몰리아(Camollia)에서 패배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시에나에 스페인 수비대를 파견하여,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였다. 시에나 시민들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며, 1552년에 스페인 수비대들을 몰아냈다. 이는 카를 5세에게 용납 할 수 없는 행위였고, 그의 장군인 잔 자코모 메디치를 보내어 피렌체-제국 동맹군과 함께 시에나를 포위하도록 하였다.
시에나 정부는 피에트로 스트로치에게 수비를 맡겼다. 이후 마르차노 전투 (1554년 8월)에 패배하면서, 더이상의 남은 희망을 잃고 말았다. 18달 동안의 저항 끝에 1555년 4월 17일 항복하며 공화국은 끝이 나게 된다.
메디치 가문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던 새롭게 왕위에 오른 스페인 펠리페 2세는 이곳(프레시디국에 합병되어 해얀요새들이 있던 영토)을 토스카나 대공국에 넘겨주었고, 19세기에 이탈리아가 통일될 때까지 토스카나 대공국에 속해있었다. 시에나 공화국 정부 인사 귀족 700여명은 1559년까지 몬탈치노에서 거주했었다.
_ 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