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文

李兆年

배상혁 2021. 1. 11. 00:41

이조년

李兆年

 

1269년
1343년

1306년 왕유소 등이 서흥후 전을 충렬왕의 후계로 삼으려 할 때 최진과 충렬왕을 보필했다.
심양왕 고의 왕위 찬탈 음모를 원나라에 상소했으며 충혜왕 복위 후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 등에 올랐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다정가〉 등을 남겼다.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되고, 충혜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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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정가〉를 지은 고려의 문장가

〈다정가〉를 지은 고려의 문장가

이조년은 고려 말의 혼란한 시기를 지켜내며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정가(多情歌)〉를 지은 문장가이기도 하다. 퇴계 이황은 “이조년은 난세에 태어나서 수많은 변고와 險難함을 겪으면서도 혼미한 임금을 받들어 지조가 금석 같았고 충직한 깊이가 후세에 우뚝하여 고려 500년 역사의 제1인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조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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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년은 성주부 용산리에서 경산부 이속인 이장경(李長庚)의 다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들 다섯 형제의 이름은 매우 독특한데, 큰형부터 아래로 백년(百年), 천년(千年), 만년(萬年), 억년(億年), 그리고 조년(兆年)이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했고 형제간의 우애는 매우 깊었다. 특히 바로 위의 형 이억년과의 우애는 남달랐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공민왕 때 형제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황금을 강물에 던진 형제 이야기(兄弟投金)가 실려 있는데, 성주 이씨의 가승(家乘)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이억년과 이조년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두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아우가 황금 두 덩이를 주워서 형에게 한 덩이를 주었다. 나루터에 도착해 형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강물 속으로 던져 버렸다. 형이 놀라서 까닭을 묻자 아우는 “제가 평소에 형님을 매우 사랑하였는데, 금을 나누어 가진 다음에는 갑자기 형님을 꺼리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은 이 물건이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기 때문이므로 강물에 던져서 잊어버리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네 말이 참으로 옳구나.”라며 자신의 금덩이도 강물에 던져 버렸다. 이 일화는 개성 유수를 지냈던 이억년이 벼슬을 버리고 함양으로 낙향할 때, 동생인 이조년이 한강 나루 건너까지 배웅해 주다가 생긴 일이라고 한다.

《고려사》에는 그에 대해 “나면서부터 키가 작았으나 날쌔고 치밀하며 정신과 풍채가 빼어났다. 자랄수록 기품이 있고 의지가 굳은 데에다 문장에 뛰어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1294년(충렬왕 20)에 급제한 후 안남 서기 예빈 내급사, 협주 지주사 등을 거쳐 비서랑이 되었다. 순탄하게만 보였던 그의 관직 생활은 1306년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면서부터 험난해지기 시작했다. 충렬왕이 아들 충선왕을 데리러 원나라로 갔을 때 왕유소(王惟紹), 송방영(宋邦英) 등이 충선왕을 모함해,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 전(琠)을 왕위에 앉히려고 했다. 이때 이조년은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충렬왕만을 보필했다.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왕유소를 비롯한 모함자들은 모두 처형되고 충렬왕을 수행했다는 이유로 이조년 역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관직에서 쫓겨난 그는 권력에 회의를 느끼고 유배 후 13년간 고향에서 은거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죄를 변명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에게 ‘대범한 군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고향에 매운당(梅雲堂)을 세우고 백 가지 화초를 심어 〈백화헌시(百花軒詩)〉를 지으며 일그러진 세상을 노래하고 학문에 몰두했다.

충선왕은 원나라에 머무르며 이따금 전지를 보내는 식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다가 1313년 고려 왕의 자리는 아들인 충숙왕에게 물려주고, 원나라에서 받은 심양왕의 지위는 조카인 고(暠)에게 물려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아버지 충선왕의 간섭을 받고 있었던 충숙왕이 친정(親政) 의지를 밝히고 나서자 심양왕은 충숙왕의 친정은 충선왕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주장하며 반발했다.

1321년 충숙왕이 원나라에 불려가 국왕인(國王印)을 빼앗기고 억류되자 고려에서는 충숙왕과 심양왕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그러자 이조년은 한림원의 관원 16명의 서명을 받아 홀로 원나라에 가서 충숙왕의 정직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덕분에 그는 1325년 충숙왕이 고려로 돌아온 뒤 감찰 장령, 군부 판서 등을 역임했다. 하지만 심양왕의 모략은 계속되었고, 충숙왕은 왕위를 심양왕에게 선양하려 했다. 이조년은 한종유(韓宗愈) 등과 함께 이를 저지했다. 1330년 세자로 원나라에 갔던 충혜왕이 돌아와 왕위에 오르자 그는 장령이 되었고, 그 뒤에도 여러 번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를 왕래하면서 고려 왕을 음해하는 세력들을 물리쳤다.

이조년은 매사에 엄격해서 임금에게까지도 거리낌 없이 직간을 서슴지 않았다. 그가 궁에 임금을 만나러 들어갈 때마다 임금은 발자국 소리를 듣고 “아, 이조년이 오는구나.”라고 하면서 측근을 물리치고 몸을 단정히 하며 그를 맞이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늘 충혜왕의 방탕함을 안타까워하며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전하가 천자를 섬기고 있으니 마땅히 하루하루 새로워야 하겠는데, 예를 버리고 정욕에 방종하여 스스로 누(累)를 초래하십니까. 좌우가 모두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니 어디에서 바른말을 듣고 바른 일을 보겠습니까. 원하건대 행실을 고쳐 경계하고 단정한 선비를 친히 하소서.” 하고 간하기도 했다.

또 충혜왕이 송강에서 탄자(彈子)로 참새 잡는 놀이에 빠졌을 때에는 임금 앞에 끓어 앉아서 “전하께서는 벌써 참소를 받고 불우하던 때를 잊으셨습니까? 지금 악소년(惡少年)들이 전하의 위력을 빙자해 부녀자들을 노략하고 재물을 강탈해 백성들이 살 수가 없어서, 신은 그 화(禍)가 조석(朝夕)에 미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러함을 걱정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질구레한 오락 따위에나 빠져 계십니까? 전하가 늙은 신의 말을 들어서 아첨하고 간사한 자를 버리고, 어질고 선량한 사람을 쓰며, 다시는 부질없이 노는 것을 멀리하신다면, 신은 비록 죽더라도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그 후에도 충혜왕은 또다시 오락과 음란에 빠져 국사를 게을리했고, 이조년은 여러 번 왕의 잘못을 충간했다. 충혜왕은 이러한 그의 태도에 버럭 화를 내다가도 그의 충성심을 생각해 바로 사과하곤 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조년은 간(諫)하다 못해, 집에 돌아와 “왕의 나이는 한창이요, 방자한데 내 나이는 이미 늙어 왕을 바로잡아 줄 수 없으니 벼슬을 떠나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미치리라.” 하고 탄식했다. 그는 마침내 진현관 대제학의 벼슬을 버리고 1341년에 고향 성주로 돌아왔다. 그는 시문에 뛰어났으며 〈다정가〉로 시작되는 시조 1수를 남겼다.

 

이화(梨花)에 월백하고 은한(銀漢)이 삼경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아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의 심정을 읊은 이 시조는 고려 시대 시조 중에서 가장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오늘날 전하는 고시조 가운데 자주 애송되는 작품이다.

그는 또한 매의 사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당시 매는 정보 통신의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를 사육해서 매사냥을 할 때까지의 순련법(馴練法)을 쓴 《응골방(鷹鶻方)》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이 책에는 먹이 주는 법, 매의 관상을 보는 법, 매의 훈련법과 매의 관리법, 병의 종류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쓴 《매사냥의 기술》보다는 70여 년 뒤지기는 했으나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매 사육서이자 축산 관계 저서로 평가받는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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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운 집필자 소개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연구실,

장희흥 집필자 소개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시대사,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며 연구 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소통과 교류의 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