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凡
白凡 廣場 '金九 銅像'과 친일 조각가 '김경승'
해방 후 없어진 조선 신궁에 뒤이어
그 자리에 우뚝 섰던 이승만 동상이 4·19 혁명으로 철거되자,
남산에 새로 자리 잡은 것은 '백범 김구 선생 상'입니다.
김구 동상은 1969년 4월 기공하여 그해 8월 건립되어 제막하였다.
동상이 들어선 곳은 조선 신궁의 중광장에 해당한다.
1963년 야외 음악당이 들어서고, 1967년에는 윤보선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의
대규모 유세가 이뤄진 곳이기도 하다. 그곳은 이제 백범 광장이라고 부른다.
- 출처: 《남산의 힘》(서울역사박물관, 2015), 186쪽 -
이승만 동상이 철거된 후 그 자리에
단군의 동상을 세우자느니, 4·19 의거 학생들을 기리는 의거 기념탑을 세우자느니,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과 대척점(對蹠點)에 섰던 백범 김구(白凡 金九)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동상 자리가 원래 1949년 김구가 암살된 후
백범 김구 선생 동상 봉립 추진 위원회에서 김구 동상을 건립하려던 자리라는 사실이다.
《경향신문》1949년 8월 18일 자는, 위원회는 건립 장소를
‘남산 전 조선 신궁 본전 앞 광장으로 정하고 당국과 교섭 중’이라고 보도했다.
그 자리에 김구가 아닌 이승만의 동상이 들어섰다가,
20년 후에 결국은 김구의 동상이 세워진 것이다.
- 출처: '남산 백범광장, 조선신궁 → 이승만 동상 → 김구 동상으로 역전 거듭'(《월간조선》, 2016년 10월호) -

서울 남산 백범광장에 있는 백범 김구의 동상. 1949년 암살 후에도 이곳에 김구 동상을 세우려는 논의가 있었다. 오래간만에 찾은 서울 남산 백범광장은 확 달라져 있었다. 칙칙한 포석(鋪石)은 걷히고 푸른 잔디가 깔렸다. 도로로 단절되었던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옛 어린이회관)·안중근의사기념관 쪽하고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남산성곽도 일부지만 복원되었다. 2011~12년 ‘남산르네상스 회현자락 복원사업’의 결과다. 옛날에는 광장에 비둘기들이 날아오고 벤치에서 쉬는 노인, 광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평일 오후이...
pub.chosun.com
동상 제막식은 1969년 8월 23일에 있었는데,
이날은 김구의 93회 생일이었다. 좌대와 높이가 각각 6.2m였다.
조각은 조각가 김경승과 민복진이 맡았고,
건립문은 소설가 박종화, 약전(略傳)은 이은상이 지었다. 글씨는 김충현이 썼다.
모두 당대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이었다.
- 출처: '남산 백범광장, 조선신궁 → 이승만 동상 → 김구 동상으로 역전 거듭'(《월간조선》, 2016년 10월호) -
그런데 자료를 찾다 보니 위의 인용글처럼
"모두 당대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예술인"이었는지는 몰라도
친일 행위를 한 인물에 대하여 지적한
아래의 사진과 글도 있더군요!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처음에는 친일파 김경승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바로 아래 백범 광장에 있는 김구 동상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겠다.
김구의 동상은 여전히 친일파 김경승이 만든 것이 그대로 놓여 있다. 뿐만 아니라
동상 뒤편 좌측에는 친일파 이광수의 글로 밝혀진 <백범일지>의 '나의 소원'이 새겨 있고,
우측에는 또 다른 친일파 이은상이 쓴 김구의 경력이 새겨 있다.
그리고 동상의 받침돌 우측에는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의 글이 새겨져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또 백범 광장에서 남대문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김유신 장군 동상>이 있는데
이것 역시 김경승의 작품이다.
- '남산에 박혀있는 치명적인 친일의 흔적'(유영호, <통일뉴스>, 2014. 11. 30.) -
그래서 '김경승'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여
우선 백과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1938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했고,
1939년의 제18회 조선미전에서는 「소녀입상」, 1940년 제19회에서는
「목동」으로 특선했고, 1941년 제20회에서는 「어떤 감정」으로 창덕궁상을 받았다.
1942년 제21회에서 특선, 총독상을 받은 「여명」은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은 노동자가 해머를 들고
노동 현장으로 나서는 모습을 조형한 작품이다.
최후의 조선미전인 1944년의 제23회에 출품한 「제4반」은
작업 도구를 멘 반라의 여성을 표현하였는데,
당시 강조되던 '여성 동원'을 고무시킨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 조선미술가협회의 평의원 및 조각분과 역원을 거쳤다.
1944년 결전미술전람회에서는 심사원으로 참여하는 한편
「대동아 건설의 소리」를 출품했다.
- '김경승[金景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네이버 지식백과) -
81척(약 25미터)에 달하는 이승만 동상을 만든 윤효중과 마찬가지로
안중근 의사상을 만든 김경승 역시 "해방 이후 친일 행위가 문제되어
미술가들의 단체인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동상은 물론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상을
이 두 친일 조각가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며
1959년 5월 23일에야 제막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동상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동상의 건립은 각계각층의 유지 및 전국의 학생들과 군관민의 성금
2천 3백여 만환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안중근 동상이 세워진 곳은 경성 신사 앞, 즉 당시 숭의여고 앞이었다.
(…) 이로써 1950년대 말 남산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조선 신궁 자리에,
안중근 동상은 경성 신사 영역에 세워지게 되었다.
제막식은 장면 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 주한 왕똥위엔 중국 대사 등
내외귀빈 유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헌화를 필두로 장면 부통령 외 많은 인사들의 헌화가 이어졌다.
이 대통령은 며칠 지난 5월 29일 안중근 동상에 직접 헌화하였다.
- 출처: 《남산의 힘》(서울역사박물관, 2015), 185쪽 -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이들 2인이 제작한 역사적 인물의 동상은 71개로 집계됐다.
이중 51개가 김경승 작품이다.
부산과 경남 충무 등 각지에 흩어진 이충무공과 관련된 조각만 4개이다.
대표적인 항일운동가 김구(남산·사진)를 비롯해 안창호(도산공원), 안중근(안중근 기념관),
전봉준(황토현 전적지), 이상재(종묘공원), 세종대왕(덕수궁), 김유신(남산), 정몽주(서울 제2한강교)
등의 동상도 그의 손을 거쳤다. 서울 파고다공원에 있는 3·1운동사 부조와
민주화의 상징인 4·19 기념탑도 그의 작품이다.
- 출처: 친일 조각가 동상 “서있기 부끄럽다”(<경향신문>, 2005. 5. 21.) -
민족문제연구소는 (2005년 5월) 20일 “역사적 인물에 대한 친일의 행적은
표준영정보다 조각 부문에 더 심각하게 투영돼 있다”며
그간의 조사·연구 결과를 이같이 밝히고
“특히 동상이나 조각은 밀폐된 공간이 아닌 공공장소에 공개돼 있어
일반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
- 출처: 친일 조각가 동상 “서있기 부끄럽다”(<경향신문>, 2005. 5. 21.) -
친일 미술인으로 분류되어 있던 이들이 국가의 공공 조형물을
제작하고 있는 것은 많은 수의 조소 예술가가 월북한 탓도 있었지만,
한국전쟁기 반공전선에 적극 협조한 때문이었다.
민족정기를 일깨우기 위하여 국가적인 규모로 조성된 위인의 동상이
국가와 민족에 대한 반역 행위를 한 친일 미술인의 손에 의해 제작됐다는 사실은
결코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 출처: '일제 찬양 미술가들 해방 후엔 위인 동상-영정 도맡아'(조은정(한남대 겸임교수), <국정브리핑>, 2005. 6. 13.) -
☞ 함께 읽을 만한 거리